기도와 큰절
작가 김나미 씨는 한 장례식장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소개 하였습니다. 다복한 가정의 노인이 말기 암으로 사망 하였습니다.그는 여러 남매들을 두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장남은 교회 장로이었고 차남은 불교 신도 회장이었습니다. 장남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여 평소 아버지를 잘 모시지 못하였지만 차남은 경제적으로 부하여 아버지를 돌아가시기 전까지 부족함이 없이 잘 돌봐 드렸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장례 방식을 두고 장남과 차남의 의견이 서로 갈렸습니다. 따라서 여형제들도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장남은 여태 것 동생 때문에 장남 노릇을 못했으니 이제야 아버지의 마지막 장례식이나마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판단에 더욱이 자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노라고 고집하고 나셨습니다. 그러나 차남은 지금까지 내가 아버지를 전적으로 모서왔기 때문에 아버지의 장례식도 자신의 신앙고백에 따라 불교식으로 치르겠다는 고집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모든 집안일을 장남 보다는 차남이 좌지우지 하여 왔기 때문에 차남의 옹고집을 꺽 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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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장례식날 새벽 일찍이 차남이 먼저 몇 스님들과 함께 영험하다는 주지 스님을 장례식장으로 모셨습니다. 스님은 곧장 목탁을 두드리면서 염불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망자를 위한 염불이 무르익을 즈음에 장남이 어려 장로님들과 함께 목사님을 장례식장으로 모시게 되였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한쪽에 자리를 잡고 그냥 묵상 하면서 스님의 염불이 끝날 때 까지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든 중 염불이 끝나자 목사님이 스님 앞으로 닦아가 두손를 합장 하면서 정중이 인사를 하자 스님은 목사님에게 머리을 숙이면서 반갑게 맞았습니다. 마치 서로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친구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스님이 목사님에게 예배드릴 차례입니다 부친이 천당으로 가실 수 있게 기도드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자 목사님은 스님에게 “부친의 극락왕생를 염불해 주서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사랑”의 도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비”의 도사인데 서로 통하지 않을 리가 없지요 하기야 사랑이 곧 자비이고 자비가 곧 사랑이 아니고 무었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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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두 패로 갈라섰든 가정불화가 이 두분의 성직자들로 인해 한 가정의 분위기가 금방 바뀌어 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마지막 이승을 떠나시던 그날에 두 형제와 자매들이 다시 하나로 화합하게 된 것 은 두 성직자들의 열린 마음 때문 이였습니다. 그런 열린 마음들이 천당과 극락이라고 하는 높은 벽들을 허물었고 형제간에 쌓여만 있던 마음의 높은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삿날에도 큰절을 하면(惡)이고 기도를 하면 복(善)이라고 우긴다면 앞선 두 성직자의 경견성을 오히려 모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그 상가에서는 그에 준하는 예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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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한 예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족들의 슬픔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마치 전쟁에서는 승리가 무었보다 다급하지만, 그러한 승리을 위해서는 먼저 병사들의 “용기” 우선이라고 함과 같습니다. 예법 보다는 슬픔이나 기쁨이 우선이고 승리 보다는 용기나 용맹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상속에 살면서도 그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가지되 신앙의틀 (儀式)에서 자유하는 신앙이야 말로 진정한 실존적 신앙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때 비로소 개개인의 실존적 신앙도 인류 보편성의 영성으로까지 승화 시킬수 있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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