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정(花石亭)(우리문화 기행)
화석정(花石亭)
화석정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61호 (파주시) 이며 경기도 파평면 율곡리 산 100-1에 있다. 율곡 이이(1536∼1584)가 자주 들러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임진강이 굽어보이는 강가의 벼랑 위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세종 25년(1443)에 율곡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처음 지었으며, 성종 9년(1478) 이숙함이 화석정 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진 후 80여 년 동안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에 율곡의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다.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다시 짓고 1973년 정부의 유적정화사업 때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申師任堂)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화석정이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 되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건물이다. 정자 안에는 ‘화석정 중건상량문’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화석정 현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화석정 뒤편의 230년된 향나무
화석정 양쪽의 560년된 느티나무
율곡 이이가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숲속 정자에 가을 이미 늦으니,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먼 물줄기는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도다.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도다.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고?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소리가 저녁 구름 속에 끊어지도다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
화석정(花石亭)에 얽힌 유래
파평면 율곡리 산 100번지에 있는 화석정은 수많은 사연이 있는 곳으로 옛날 한양과 송도를 거쳐 신의주로 가는 국도변 임진나루터 길목 우뚝 솟은 기암절벽에 자리잡고 있는데 고려말 대유(大儒)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의 유지(遺址)로서 야은 선생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삼은(三隱)이라 하였다.
이조가 개국되자 1400년(정종 2) 길재선생은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제수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명목으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화석정터에서 후배를 양성하면서 교하향교 훈도를 지냈다.
그러나 수차 조정에 출사하라는 성화로 경북 금오산에 은거 학문을 연구하여 후배 양성에만 전념 세월을 보내던 중 1419년(세종 1) 67세로 별세하니 수많은 문인들이 선생의 얼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세웠는데 세종대왕은 그의 충절에 탄복 금오서원(金烏書院)으로 사액하고 충렬공이라 시호를 내리셨다 한다.
그 후 폐허된 자리에 율곡선생의 5대조이신 강평공 이명신(李明晨)이 서기 1443(세종 25년)에 정자를 창건하고 양원 이숙함(楊原李淑緘)이 화석정으로 이름을 지었다 하며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으로부터 수축한 후 율곡선생께서 손수 새로 터를 닦고 중수한 유서깊은 정자이다.
선생은 국사의 여가와 퇴관 후 여생을 보내면서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 수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중국 사신들이 자주 찾아 금시청유(昑詩淸遊) 하였다 한다.
정자주변에는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정하에는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주야로 항선(航船)이 오르내리며 밤에는 어화(고기잡는 등불)로서 호화 찬란하였으며 당대 여류가인 운초(雲楚)라는 가수는 송경을 지날 때, 온종일 꾀꼬리는 울고 이원성은 고려를 통곡하네(盡日黃鶯啼宛是哭高麗)라는 시조를 읊으며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읊었던 것과 같이 이곳의 물소리는 또한 말할 수 없는 선경이다.
그러나 유서깊은 명승으로 알려진 화석정은 우리민족의 비극인 선조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득이 선조대왕께서는 의주로 파천하게 되어 4월 29일밤 어두운 침침한 임진나루 절벽에 당도하니 마침 억수같은 폭우가 쏟아져 뒤쫓는 왜적 때문에 빨리 강을 건너가야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난감하기 이를 때 없어 중신들과 의논 끝에 임진나루 옆에 있는 순청(巡廳)에 불을 질러 도강키로 하고 불을 지르니 워낙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라 별로 시원치 않아 할 수 없이 호종하던 이항복이 화석정에 올라가 이에 불을 지르니 화광이 충천하여 무난히 배가 건너갔다 한다.
이 화석정은 율곡선생이 이럴줄 미리 알고 정자에 있을 때 들기름을 제자들에게 수시로 한 종지씩 가져오라 하여 매일같이 기둥, 도리, 석가래 등에 반질반질하게 먹이어 두었었다 하며 또한 백사 이항복도 이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소실된 것을 율곡의 증손 이후지와 이후방이 재건하였으며 6·25사변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966년에 국회의원 신윤창의 주선으로 일부 정부보조와 각지 유림들의 정성으로 새로 복원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화석정(花石亭)이란 현판을 걸게 되었다.
따라서 서기 1973년 군비 보조로 유림들과 주위 환경을 정화하고 1974년 9월 26일 지방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으며 1980년 파주시 예산으로 보수와 환경정리를 새로 하고 자주 정화를 하고 있어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수시로 줄을 이어 찾아오고 있다.
정내에는 많은 시액(詩額)이 있었으나 그중 유명한 것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던 이율곡 8세 작시로서 백세현판이라고도 전해지며 우계 성혼(牛溪成渾)과 손목(孫穆)이 92세때 근서한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 밖에도 서거정, 이숙함, 이의석, 이의무, 권람, 정철, 오억령, 송시열, 박세채 등이 화석정에서 시조를 읊었다 한다
출처:파주문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