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미 2010. 12. 16. 21:59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의 어린아이 잡아먹은 괴물로 오해받는 성덕대왕신종과 그 전설의 실체를 알아보겠습니다.

국보 제 29호 성덕대왕 신종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선친인 33대 선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들기 시작해, 완성을 못보고 경덕왕의 아들인 36대 혜공왕 7년(771년)에 완성한 성덕대왕신종은 선덕왕의 원찰인 서라벌 알천(북천)변 봉덕사에 걸려 있었다. 신라시대부터 물난리가 잦았던 알천이 어느해 범람해 성덕대왕신종은 봉덕사와 함께 쓸려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듯 하였으나 세조 6년(1460년) 알천 바닥에서 다시 발견돼, 당시 경주부윤인 김담이 영묘사로 옮겨 달아 놓고 군사들을 모을 때 이종을 치곤하였다.

동대봉산에서 시작해 덕동호와 보문을 거쳐 경주 시가지 북쪽을 흘러 예기청소에서 서천과 합쳐지는 알천. 경주시내 북쪽을 흐르기에 북천이라고 불리고 보문쪽은 지도상으로 보면 경주 동쪽에 있기에 동천이라고도 불린다. 예로부터 큰비가 내리면 자주 범람을 하였다. 기록에는 신라 각간 김경신이 37대 선덕왕이 죽고 후임으로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불어난 알천 때문에 입궐이 늦어지자 먼저 궁궐에 들어가 38대 원성왕에 오른다. 보문 쪽으로 가면 알천수개기라 하여 조선시대 알천 범람을 막기 위해 보수한 기록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6.25 전쟁 직후 UN 산하 운크라의 지원으로 받은 식량을 품싹 대신 지급하여 현재의 보문댐을 만들고 이후 1975년 덕동호를 완공해 물을 가두기 시작해 현재는 수해를 입지는 않고 있다.

전불시대 칠처가람 중 하나인 사천미(沙川尾) 영묘사터.

오릉에서 경주 공고 쪽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보인다. 현재는 흥륜사란 절이 들어서 있다. 1970년 경에 이곳을 옛 흥륜사터로 알고 절을 짓고 흥륜사란 절을 지었는데, 현재는 영묘사터로 밝혀지고 있다. 알천 강바닥에서 발견된 성덕대왕신종은 1460년부터 영묘사에 잠시 머물다 영묘사가 화재로 소실한 후 중종 원년(1506년) 경주부윤 예춘년이 경주 읍성 남문인 징례문 밖 봉황대옆에 종각을 짓고 성덕대왕신종을 영묘사에서 옮겨와 성문을 여닫을 때와 정오에 종을 쳐 시각을 알리는 역활을 하는데 사용해왔다.


1910년대 경주 읍성 남문인 징례문의 모습. 현재 경주 법원 건너편 골목 포항 물회 건물 자리로 추정이 된다.



1950년대 봉황대 모습. 1970년대 경주 개발을 할때 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현재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지역은 "미나리꽝" 이라 하여 미나리가 많이 자라던 습지였다. 민가를 매입하고 습지를 덥어 노서동 고분군과 노동동 고분군 그리고 대릉원을 조성하였다.



현재의 봉황대의 모습(125호분) 이곳에 1915년까지 영묘사에서 옮겨온 성덕대왕신종을 종각에 걸고 타종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주도로 만들어진 경주고적보존회가 읍성내 관아자리(현재 경주문화원)에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을 만들고 2년후 1915년 봉황대 앞에 있던 종각과 종을 관아로 옮겼다. 이후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가 된 것을 계기로 1926년 관아 자리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이 자리잡았고 이후 1945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이 생긴 후 1975년 새 국립경주박물관 신축을 계기로 현 장소로 이전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현 경주문화원 자리에 남아 있는 종각의 모습. 봉황대 앞에 있던 종각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한다.


1975년 성덕대왕신종 현 국립경주박물관으로의 이전 장면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봉덕사종, 에밀레종)

범종(梵鍾)이란 무엇인가

종은 예로부터 사람을 모으거나, 시간을 알릴 때, 그리고 의식을 거행할 때 쓰여왔습니다. 특별히 불교에서 쓰이는 종은 '범梵'자를 붙여 범종(梵鍾)이라 이라고 부릅니다. 이 범종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이 소리를 듣게 되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던 중생까지도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자로 종하면, 쇠金 변에 아이童 자가 붙은 鐘자를 씁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졸을 일컬을때 이렇게 씁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을 지칭할때는 쇠金 변에 무거울重 자를 붙여 종鍾를 씁니다. 그 연유는 알수 없으나 종에 세겨진 글씨나 기록에 종鍾 자가 쓰였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종과 우리나라의 종은 한자뿐 아니라 그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종을 매다는 종뉴(鍾紐)는 중국식의 머리 둘 달린 용이 아니라, 머리와 다리를 힘차게 뻗치고 있는 한마리의 용입니다. 이 종뉴 옆에는 중국이나 일본 종에는 없는 음통音筒(용통 用筒 또는 음관 音管이라고도 함)이 있습니다. 또한 중국 종이나 일본 종과는 달리 종의 위아래에는 보상화 무늬나 모란 당초무늬를 새긴 띠(문양대 文樣帶)와 4개의 유곽(乳廓)도 있으며,유곽내에는 각각 9개 총 36개의 유두乳頭(연꽃 봉오리와 같아 연뢰라고도 함)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천상과 종을 치는 당좌가 새겨져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재까지 존재하는 종들 중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가졌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실제 타종을 했으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인 국보 36호 상원사 종이 허벌나게 두둘겨 맞아(타종으로) 균열이 발생한 후 이 성덕대왕신종도 보호를 위해 타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하루에 몇 번 녹음된 종소리를 들려주고 있는데, 죽기 전에 실제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성덕대왕 신종의 종소리는 정말 하늘의 소리와 같다고 합니다. 예전 일본 NHK에서 세계의 종들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찍으면서 종소리를 비교해 보았는데, 여타 종들이 성덕대왕 신종의 소리를 따라갈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서양종과 동양종의 모양이나 타종 원리도 다릅니다. 그리고 동양의 종들도 중국, 한국, 일본이 모양에서 보면 구분이 가능할 정도이죠.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은 미얀마의 민군 종으로 약 90 여톤 정도라 합니다. 18톤을 조금 넘는 정확히는 18.9톤, 성덕대왕 신종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하죠. 그러나 소리는 성덕대왕 신종과는 비교가 불가입니다. 원래 기술력이 떨어지면 뭐든 거대하게 만들려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후 기술력이 축적되고 문화가 발달하면 점점 작아지면서 빼어난 작품이 나오게 되죠.

 성덕대왕 신종 종소리 by 찢어진 워커.wma

이 종소리의 녹음은 1993년 5월 4일 새벽 2시에서 4시사이에 온도, 습도, 기압이 가장 이상적인 시간을 택해 그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녹음기술을 지닌 (주)화음 레코드사의 기술진이 총동원되어 녹음을 하였답니다. 또 국방부와 경찰의 협조를 받아 항공기 운항 통제 및 반경 4km의 교통통제를 하였는데, 워낙 조용하다보니 박물관 인근 민가의 견공들이 울어 대서 박물관 직원들이 뇌물(먹이)을 먹여 조용히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엔 박물관 옆 남천에 살고 있는 개구리 왕눈이와 여친 아로미가 물어대서 박물관 직원들이 작은 돌을 던져 가며 녹음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박물관 서점에서 판매를 하였는데, 지금은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유는 찾는 사람이 없어서...

 

<신라문화동인회 김윤근 회장 증언>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

 

성덕대왕종의 본래 이름입니다. 이종에 관한 유래는 삼국유사의 제 4 탑상편에 나와있는데,

 

황룡사종, 분황사의 약사여래불, 봉덕사의 종

 

신라 제 35대 경덕대왕이 천보 13년 갑오년(754년)에 황룡사의 종을 주조했는데, 길이가 열자 세치고 두께는 아홉 치며 무게는 49만 7581근이었다. 시주는 효정이왕 삼모부인이며, 공장은 이상택 노복이었다. 숙종(당나라 숙종)때 다시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여섯 자 여덟 치였다. 또 다음해인 을미년(755년)에 분황사 약사여래불 동상을 주조했는데, 무게는 30만 6700근이고, 공장은 본피부 강고내말이었다.

 

또 경덕왕은 황동 12만근을 들여 선친 성덕왕을 위해 큰 종 하나를 주조하려고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아들 혜공대왕 건운이 대력 경술년(770년) 12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공장을 모아 종을 완성한 뒤 봉덕사에 모셨다. 이 절은 바로 효성왕이 개원 26년 무인년(738년)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위해 지은 절이다. 그래서 종의 이름을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라 했다. 조산대부 전태자사의랑 한림방 김필해(金弼奚)가 왕명을 받들어 종의 이름을 지었는데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삼국유사

 

위 삼국유사에도 나와있듯이 35대 경덕왕이 아버지 33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들다 실패해 경덕왕의 아들인 36대 혜공왕이 완성을 한 종이다. 33대 성덕왕은 원래 장자를 태자로 삼았으나 일찍 죽자 둘째인 효성왕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릅니다. 효성왕이 후사없이 죽자 성덕왕의 새째아들이자 효성왕의 동생인 헌영이 제 35대 경덕왕에 오릅니다. 효성왕은 아버지인 성덕왕을 위해 봉덕사를 세우고 경덕왕은 종을 만들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경덕왕의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을 해, 큰아버지인 효성왕이 세운 봉덕사에 종을 달게 됩니다. 그래서 이종은 봉덕사에 달렸던 종이라 봉덕사 종이라고도 불립니다.

 

삼국을 통일 후 정치적 안정기를 맞이하여 많은 통일신라 시대의 걸작을 만들어낸 경덕왕시대는 사실, 경덕왕의 강력한 왕권강화 정책에서 기인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경덕왕 재위 시절 왕권강화를 위해, 이에 반대한 많은 귀족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지 집권 후기엔 귀족들의 거센 반발도 있게 되는데, 여러 신라 왕들에게서 엿볼수 있듯이, 경덕왕대엔 왕권강화와 왕실의 번영을 위한 여러 국가적 사업을 많이 시행을 했습니다. 삼국유사에 언급이 되었듯이 황룡사종 주조,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 창건 그리고 성덕대왕신종 주조까지...


종뉴와 음통 그리고 천판

종뉴(鍾紐)는 종을 매다는 고리로, 용모양을 하고 있기에 용뉴 라고도 함.
음통(音筒)은 대롱모양의 관으로 용통 또는 음관이라고 하며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수 있습니다. 음향을 조절하는 역활을 합니다.
천판(天板)은 종뉴와 음통이 있는 넓고 평평한 부분을 말합니다.
견대(肩帶)는 천판 바깥쪽을 돌아가며 있는 장식 띠를 말합니다.



상대 그리고 유두와 유곽

상대(上帶)는 종신 상부에 있는 무늬 띠입니다.
유두(乳頭)는 연꽃 봉오리 형태로 돌출된 장식으로 연뢰라고도 합니다.
유곽(乳廓)은 유두를 둘러싸고 있는 네모난 고리띠를 말합니다. 연곽이라고도 합니다.




당좌 1

당좌(撞座)란 종을 치는 자리입니다.

이 종의 또 다른 이름은 에밀레종인데 그것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면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종을 만들라 명하여 종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신라의 최고의 종을 만드는 장인을 불러 모았고, 종을 만들기 위한 비용 마련을 위해 많은 스님들이 민가로 시주로 받기 위해 나갔다. 종을 완성해 처보았지만 소리가 나지 않아 다시 만들게 되었는데,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다니던 스님의 꿈에 몇 일전 시주를 받지 못한 집 아이를 데려와 쇳물에 넣으란 말이 들렸다, 곰곰히 생각을 하던 스님은 얼마전 시주를 받으러 갔다가 "집에 시주할 것이 없으니, 원하면 아이라도 데려가시오" 라고 문전박대를 한 여인의 집이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다른 스님들과 함께 그 집으로 가 갓난아이를 내놓으라고 했고, 버티는 어미 품에서 갓난아이를 빼았듯 시주 받아 쇳물에 넣어 종을 만들었더니 과연 종이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종을 치면 갓난아기가 어미를 애타게 찾으며 우는 소리가 들려 후세 사람들은 에밀레 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게 내려오는 전설의 대략 내용이다. 실제 종소리를 들으면 "떠~어엉~ 엉~" 하며 울림 현상이 어찌들으면 아이가 우는 듯한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당좌 2

 이 글을 쓰기전에 과연 전설상의 이야기가 실제일까? 아님 아닐까? 라는 고심을 해보았다. 그때 내린 결론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현재의 잣대로 1200 여년전의 신라를 눈금짓한다는 것은 신중해야했다. 사서에도 나오듯이 왕이나 지배자급이 죽으면 순장이라 하여 산사람을 죽여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신라는 22대 지증왕까지 이어졌다. 지증왕에 이르러서야 순장을 금지하였다. 또 삼한통일 후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통일신라시대, 항시 금은보화와 재물이 드나들었다는 35 금입택이 있었고, 서라벌의 모든 집이 초가는 없고 기와를 올려, 불국사까지 기와집 처마가 이어져 비를 맞지 않고 갈수 있고, 숯으로 밥을 해먹었다는 그 시기에 관한 기록을 보면 왕족과 귀족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의 삶은 순탄치 만은 않다. 한겨울의 추위 속에 아이를 낳고 죽어가는 거지 여인의 이야기(정수법사 이야기 제40대 애장왕), 늙은 노모를 위해 부자집 종으로 팔려가는 효녀의 이야기(빈녀양모, 제51대 진성여왕), 늙은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산 자식을 묻으러가는 손순의 이야기(제42대 흥덕왕) 등을 고려해 볼때, 왕의 명에 의해 만들어지는 종을 만들기 위해 일반 백성의 간난아기를 충분히 끓는 쇳물에 던져 넣고도 남았으리란 생각이 들었었다. 에밀레 종에 관한 이야기는 세간에 워낙 널리 알려져 있기에 국립경주박물관 측에서 종의 성분에 관한 조사까지 진행할 정도 였다. 결과는 인체의 뼈 성분인 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경주 지역의 여러 향토 사학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에밀레종에 관한 전설은 삼국유사나 동경잡기와 같은 기록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으며, 1920년대부터 갑자기 구전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에밀레종이란 말이 생겨났을까?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1925년 8월5일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창작문예란에 염근수란 작가가 어밀레종이란 동화를 발표한다. 내용은 종의 주조 과정에서 인신공양(아이를 넣음)을 해서 종의 소리를 내게했다는 내용인데, 성덕대왕신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1942년 극작가 함세덕이 염근수의 어밀레종 동화에 살을 붙이고 성덕대왕신종의 명문까지 제시하며 '어밀레종'이란 희곡을 발표하고 현대극장에서 연극으로 올려지자, 성덕대왕신종은 졸지에 불쌍한 얼라잡아묵은 괴물종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1925년 이후 여러 기록에 성덕대왕신종이 어밀레종의 이야기와 관련되었다는 기록들이 종종 비치는 것으로 보아 범인 바로 염근수의 '어밀레종'이란 동화이다. 염근수나 함세덕이 우리 문화를 폄하하려는 특정목정을 가지고 글을 썼다곤 생각하지는 않지만, 결국 허구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마치 사실인양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예는 종종 찾아 볼수 있는데, 괘릉 인근의 영지가 불국사 창건 당시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이야기의 배경이 된 것도 또한 현진건의 소설이 한 몫을 단단이 하게 된다.

에밀레종에 관한 전설은 어찌보면 재미있으면서도 매우 잔인한 전설이지만, 한편으론 근래 만들어낸 거짓 전설로 인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성덕대왕신종을 알고 있으니 아러니컬하다.




비천상 1

비천(飛天)은 당좌와 당좌 사이에 세겨진 장식으로, 종에 따라서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 불, 보살상, 보살입상등이 세겨집니다.



비천상 2

연화대에 앉아 향을 공양하는 비천과 향과 함께 하늘로 피어오르는 당초무늬는 마침 당장이라도 하늘로 올라갈거 같은 비천을 새긴 것으로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비천상으로 손 꼽히고 있습니다. 이 비천상은 이후 제조되는 범종의 기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천상 3



성덕대왕신종은 봉덕사에서 알천 거랑(川) 바닥으로, 영묘사로, 다시 봉황대 아래로, 그곳에서 일제에 의해 현 경주문화원 자리로, 다시 현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지며 많은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1920년대 전후 에밀레종에 관한 괴소문이 퍼지면서 세간에는 봉덕사종을 긁어 삶아 먹으면 아이를 가진다는 이야기가 퍼져 지금도 그 상처의 흔적이 뚜렸하다. 

데레사댁 : 풀싸댁 어디 당겨 오는겨?
풀싸댁 : 삼신할미꼐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칠불암 부처님께 치성드리고 왔심더
데레사댁 : 그려? 근디 그 손에 든 종이는 먼가?
풀싸댁 : 이거이 그... 긍께 부처님 코 좀 긁어 왔심더. 부처님 코 긁어 먹으면 아들 낳는다고 해서 말이지요잉...^^
데레사댁 : 풀싸댁, 아직 모르고 있었구만..
풀싸댁 : 뭘여?
데레사댁 : 그거 옛말이고, 옛 경주 관아에 있는 봉덕사종 말이여..여차 저차 (중약), 쑤근쑤근.. 꿍따리 사발라, 알았는가?  그거 긁어 먹으면 아이 낳은 당께..즉빵이여 즉빵..
풀싸댁 : 머시라 형님, 고게 참말인겨?
데레사댁 : 하모.. 긍 그 쇳물에 던져진 간난아그가 봉덕이였고, 그 종에 세겨진 살려달라고 비는 것이 바로 봉덕이랑께, 그래서 이름이 봉덕사종 아니가? 봉덕이 이름을 따서..
풀싸댁 : 음메, 이러고 있을 떄가 아니제, 형님 내 후딱 당겨 오겄소 !!!!

아기낳은다는 미신 때문에 경주 지역 부처님 코가 남아 나지 않았는데, 일제시대 만들어진 괴 전설로 인해 봉덕사종 비천상 밑에 그떄의 상처가 또렷이 남아 있다..


비천상 4


비천상 탁본



종명 1

종명이란 종을 만든 내력을 세겨넣은 것으로 성덕대왕신종엔 2곳에 1037자로 쓰여진 종명과 가사가 있다. 종명은 종을 만들게 된 내력을 적은 것이고, 가사는 성덕대왕을 기리는 가사를 적은 것이다. 원래 너무 길어서 안쓰고 넘어갈려고 했는데, 혹 만에 하나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허벌나게 써 본다. 일반인들은 안 읽어보는게 좋을지도 모르니, 알아서...

 

성덕대왕 신종명(聖德大王神鐘之銘)

조산대부 겸 태자 조의랑 한림당 김필해는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 이에 종명을 짓습니다.

지극히 완전한 진리는 온누리의 밖을 싸고 있으므로 보려 하여도 볼 수 없는 것이고 참된 진리의 소리는 천지간에 울리므로 들으려 하여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진리의 근원을 우리 중생들도 보고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 모량과 소리를 비유하여 방편으로 신종을 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는 길에는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 등 세 가지 수레가 있다고하지만 이 신종의 소리는 한번 들으면 곧바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 신비의 둥근 소리 일승원음(一乘圓音)인 것입니다. 

무릇 종이란 부처님이 나신 인도에서 살펴보면 카니시카왕 때에 시작되었고, 중국에서는 고연(鼓延)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합니다. 안이 비어 있어 그 울림은 무한하고 몸체는 무거워서 굴릴 수도 없고 감아 올릴 수도 없으니 형상에 있어서나 소리에 있어서나 지극히 영원한 것입니다. . 

이렇게 영원한 신종 위에 삼가 임금님의 높으신 뜻을 새기옵니다. 임금님의 뜻을 이곳에 새기옴은 백성들이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서 복을 받게 하여는 소원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면 성덕대왕의 크신 덕은 산보다도 높으시고 물보다도 더 깊으시어 그 이름은 해와 달처럼 하늘 높게 빛나옵니다.

어질고 충성스러운 사람을 부러 신하로 쓰시고 예와 악을 높여 나라를 다스리신, 들에서는 백성들이 근본이 되는 농사에 힘을 쓰게되고, 저자에는 도둑물건과 속여 파는 물건이 업게 되었습니다. 

또 백성들은 돈을 많이 모아 사치와 허영에 사는 것을 싫어하고, 글 잘하고 덕이 높은 것을 부러워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내 몸의 영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늙어가며 생겨나는 노욕을 경계하시면서 40여년간 나라 다스리는 동안 한 번도 전쟁으로 백성들을 놀라게 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에 사방의 이웃나라들과 멀리 만리 밖에서 온 사신들이 모두 공경하고 부러워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남의 나라에 화살을 겨누어 침략하고자 하신 일도 없으시니 중국의 연나라가 진나라에서 낙의(樂毅)나 고리해(高里亥) 같은 사람을 써서 남의 나라를 괴롭힌 일이나, 제나라나 진나라에서 남의 나라를 무찌르고 패권을 잡은 일들과 어찌 나란히 굴러가는 수레바퀴처럼 비교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리쌍수 아래 인생의 지난날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대왕님의 춘추도 빨리 흘러 세상을 떠나신 지도 어느듯 34년이 지났습니다. 

위를 이으신 경덕대왕꼐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아버님의 뜻을 이어받으시어 정치를 보살피시면서도 불행하게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을 정성껏 모시지 못한 안타까운과 거듭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께 충성을 다하지 못한 슬픔에 대궐에 드시어도 눈물로 정사를 살피시었습니다. 조상님들을 그리는 정과 부모님을 그리는 슬픔을 한데 뭉쳐 큰 종을 짓고자 구리12만근을 들여 정성을 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이제 새로 위에 오르신 우리 임금(혜공왕)께서 선대 대왕님들의 뜻을 이어 받으시고 어지신 덕으로 나라를 보살피시니 상서로운 빛은 옛 보다 더욱 나라안에 빛나옵니다. 아름다운 덕은 서울장안에 넘쳐 임금님의 뜰 안에 구슬진주를 뿌린 듯 찬란 하옵고, 임금님의 말씀은 나라안에 우레와 같이 퍼지니 나라에 생명을 타고난 초목들까지 은혜를 입어 나라지경에 과실나무가 주렁주렁 풍성하옵니다. 서울 장안에 서기라 어려 영롱하오니 이는 임금님께서 왕자로 태어나신 책임을 다하시어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 옵고 왕위에 오르신 책임을 다하시어 선대 여러 조상님들의 뜻에 보답하시는 길이옵니다.

우러러 생각하오면 태후께서는 땅이 평평한 것처럼 성품이 고요하시어 백성들을 어질게 보살피시고 하늘 거울과 같이 밝으신 마음으로 부자간에 있어 효도하시기를 권하시었습니다. 친정의 어진 혈통을 받으신 태후께서는 간신들을 멀리하시고 충신들을 가까이하여 옳은 말과 거짓말을 가려서 바르게 일하셨습니다. 이에 경덕대왕의 유언을 지키셔서 오랜 소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유사에서 공사를 명하시고 공장이를 시켜 그림을 새기시니 해는 신해년(辛亥年771)이로. 달은 섣달입니다. 이때 해와 달은 빛을 더해 주셨고, 음과 양이 조화되어 바람은 자고 날씨는 고요하였습니다. 신의 도움으로 신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생김새는 뫼 뿌리와 같고, 그 소리는 용이 우는 소리와 같아서 위로는 산마루 하늘까지 울려 퍼지고, 밑으로는 지옥을 지나 끝간데를 알지 못합니다. 보는 이는 기이함을 칭송하고, 듣는 이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하옵니다. 이 묘한 인연으로서 성덕대왕의 높으신 영(靈)을 받들어 이 맑은 울림을 들으시게 하옵고, 위없는 법 자리에 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과거와 현세의 인연을 확실하게 알아 일승진경(一乘眞境)에 계시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슬떨기와 같은 임금님의 후손들도 금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보배열매와 같이 풍성하게 길이길이 번영케하여 주시옵소서. 나라 울타리는 쇠울처럼 굳건하여 나라에 생명을 타고난 사람들과 축생들에 이르기까지도 바다에 이는 물결과 같이 고르게 깨달음의 길에 올라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하 해(奚)는 배운 것이 없고 재주도 없습니다마는, 임금님의 분부이신 까닭에 용기를 내어 반초의 붓을 빌리고 육좌(陸佐)의 말을 빌어 그 원하시는 뜻을 적어 종 위에 새겼습니다.
                                          

<신라문화동인회 윤경렬 선생, 경주박물관회 김원주 번역>


종명 2
다른 편에는 성덕왕을 찬미하는 가사가 적혀있습니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걸려 있고 별들이 가득차 반짝이는데
땅에는 방향마다 길이 열려 사방이 트여 있네.
산들은 땅을 눌러 드높게 솟아 있고
강물은 갈래갈래로 퍼져 흐르니
벌려진 지역들은 지경이 분명하구나.

동해 위에 떠있다는 신선들의 나라도
땅 위에 숨어있다는 무릉도원도
해뜨는 나라 부상(扶桑)까지도
이제 우리 나라와 이웃하였네.

흩어진 세 나라가 하나로 합쳤으니
역대 임금들의 성덕은
대를 이러 더욱 세로와졌네.

묘하고 맑은 다스림은 멀리까지 빛나고
크신 은혜 만물 위에 비 뿌리듯 고르게 입히시니
무상한 천대 자손들 길이길이 웃음짓누나.

근심 구름이 하늘을 가려 문득 슬프니
밝은 해는 빛을 거두고 따스한 봄은 가버리더라.
다스리는 그 풍습 예와 다름없으니
임금이 바뀐들 성스러운 그 풍속이야 어찌 어기리오.

날마다 아버님의 엄훈을 생각하옵고
항상 어머님의 크신 사랑 그리워함에
또다시 부모님 명복을 위해 하늘 종에 비옵니다.
거룩하시어라 우리 태후시여
그 성덕 감응하심이 가볍지 않아
보배로운 상서가 자주 비치고
성서로운 보람이 매양일더라.

임금이 어지시니 하늘이 도우시고
때가 태평하니 나라가 평안하더라.

선대를 사모하는 꾸준한 그 정성
그 마음 좇아서 소원이 이루어졌네.

남기시고 가신 말씀 돌보아 종 만들기 시작하니
신령이 도우고 사람들이 힘을 모아
보배그릇 모양이 이루어졌네.
능히 마귀들의 항복을 받고 어룡을 얻으리로다.
그 위엄은 누리의 북쪽 끝 북극에까지 울려 퍼지네.
듣는 이 보는 이 모두 부처님과 한 마음되니
꽃다운 인연을 바르게 심어 놓았네.

둥글고 빈 몸은 바야흐로 부처님 몸이시라
크나큰 복 누리에 변치 말고 길이길이
무궁토록 이어져 가게 하시옵소서

한림랑 김필해 봉조찬(翰林郞 金弼奚 奉詔撰)
대조 대나마 요단서(待詔 大奈麻 姚湍書)

참교사 병부랑 겸 전중령 사어부령 수성부령감 사천왕사부령 배검교 진지대
왕사사 상상 대각간 신 김옹
검교사 숙정대령 겸 수성부령 검교 감은사사 각각 신 김양상
대력6년 세차 신해 12월 14일

부사 집사부 시랑 아찬 김체신
판관 우사록X 급찬 김X득
판관 급찬 김충봉
판관 대나마 김XX
녹사 나마 김일진
녹사 대사 김XX
주종대박사 대나마 박XX
차박사 나마 박XX
나마 박한미
대사 박XX

위에 보니 나중에 혜공왕에게 칼침을 준 김양상의 이름도 나오네요..

하대와 종구


하대(下帶)는 종구와 연결된 무늬띠입니다.
종구(鍾口)는 종의 터진 입구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명동

명동은 공명통이라도 불리웁니다.





성덕대왕신종 탁본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1층 현관에 걸려 있습니다.

35대 경덕왕대에 이어 성덕대왕을 기리고 왕실의 번영을 빌기 위해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었지만, 정작 종을 완성한 제 36대 혜공왕은 종을 완성하는 중책을 총괄했던 숙부 김양상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비록 에밀레종의 전설은 근래에 만들어진 거짓이었지만, 종소리에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는 숙부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는 36대 혜공왕의 절규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