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調. 童詩, 漢詩/역사자료

삼전도비(三田渡碑)

무너미 2009. 5. 3. 19:06

종 목 사적 제101호

명 칭 삼전도비(三田渡碑)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면적 2,850㎡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송파구

 

일반설명 | 전문설명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삼전도비의 탁본 자료와 비문(대청황제공덕비)의 전문과 한글 번역판이다.

읽는 동안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낄 정도여서 서울노인 복지센터 문화 봉사

회원님들도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사이트에서 퍼가지 못하게 막아 놓아서 주소를 복사했으니

아래 주소를 클릭하고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sabul358/18321759


삼전도(三田渡) 치욕의 길

(이조판서)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예조판서)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예조판서)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 김훈의《남한산성》중에서 -

 

* 조선 임금(인조)이 걸어간 삼전도(三田渡) 항복의 길,

그 치욕의 길을 놓고 신하들의 갑론을박이 치열합니다.

결코 옛날 일로만 흘려버릴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의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우물 안에 갇혀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면

새 길을 낼 수 없고, 새 길을 내지 못하면

부끄러운 역사의 옛길을 다시 밟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