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절집이나 '불이문'은 있기 마련이지만 '서산마애삼존불'로 가는 불이문처럼 작은 문은
처음 보았읍니다.
한 사람이 겨우 빠저 나 갈수있는 아주 작은 문이었읍니다.

불이문을 지나면 곧바로 깊은 계곡이 나오고 계곡에서 부터 쌓아 올린 높다란 축대가 있읍니다.
대략 15미터 정도 되는 축대 위에 고귀한 마애삼존불이 있읍니다.
마애(갈마, 낭떠러지 애)란 벼랑, 절벽에 있는 삼존불이라는 의미입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원래 마애삼존불은 좁고 깊은 낭떠러지 위에 존재하고 있어서 계곡 밑에서 올려다
봐야 겨우 바라 볼수있게 되어있어서 그 신비함이 극에 달하게끔 설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70년대 보호의식의 발로가 축대를 쌓아 올려 바로 눈 앞에서 정면으로 보게
개조되어 지금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국보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은 학자에 따라 서기 570년에서 640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진다고
합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가운데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으로 추정되는
보살상이 있읍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현재)와 미륵(미래),
제화갈라보살(과거)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뛰어난 불상이라고 합니다.
해의 위치에 따라 다양하게 표정이 바뀌는 신비한 미소가 '백제의 미소'라고 명명되었답니다.
여기서 또 안내자의 말을 들어 보지요.
마애삼존불이 깊고 높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서 오랜동안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잘 보존될수 있었다는 군요.
조선시대 세도가 흥선군이 남연군묘를 조성하기 위하여 수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바로 개울하나 건너에 있는
좁은 길로 수없이 들락 거렸어도 마애삼존불의 존재를 몰랐다고 합니다.
어느날 나무꾼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돌아와 이야기 하기를 절벽위에 사람이 새겨저 있는데
가운데 젊은 남편이 서 있고 왼쪽에는 첩이 남편을 바라보며 아양 떨고
오른쪽에는 본처가 두손으로 돌맹이를 안고 서서 첩을 내려 칠까말까 망서리고 있더라고 전하더랍니다.
이 말을 듣고 달려와 사진 석장을 찍었는데 그때가 1957년이었고 그중에 한장은 사진사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답사끝에 1958년 마애삼존불의 발견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누가, 무슨연유로, 어떻게 세웠는지 알려진게
없어서 앞에다가 지역이름을 붙여 '서산마애삼존불'이라고 칭 했다더군요.
1500년 동안 자연속에서 아무 탈 없이 잘 존재하던 것을 1974년 풍화방지를 막는답시고 정자처럼 보호각을
세웠읍니다. 자연광을 배제하고 전구를 밝혀 놓았더니 그 아름다운 '백제의 미소'는 간데 없고 백화현상만
나타나 오히려 파손을 가속화 했답니다.
32년만인 2006년 보호각의 기둥과 지붕만 남기고 해체하였읍니다.
빗물을 막으려고 남겨둔 지붕도 삼존불에게 해만 끼첬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읍니다.
드디어 2007년 12월 28일 지붕도 철거해 버렸읍니다.
방속에 갇혀있던 삼존불께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 오셨으니 얼마나 시원하시겠어요,
"나무아미타불 관셈보살'

발견당시 처음 촬영한 사진.
계곡 구석진 곳에서 찍었다고 위치까지 설명해 주더군요.

제화갈라보살입상
보주형두광을 배경으로한 안면이 위엄을 더 합니다.
둥그스럼한 얼굴형과 가늘게 뜬 눈과 입가의 미소는 온화하면서도 위엄을 잃지않고있는 백제인의
모습입니다.

석가여래입상
얼굴 전체를 볼때 내게는 미소를 넘어 소리없는 웃음으로 보입니다.
150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이목구비가 또렸할수가 없읍니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는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데 이분은 두눈을 크게 뜨고있읍니다.
안내자의 말을 들어보면
어떤 학자는 눈동자가 없어서 가치가 덜 하다고 하는데 왼쪽 눈을 보면 눈동자가 보인다고 하더군요.
나 역시 눈동자가 보입니다.
이마 위의 파손부분은 백색 이끼가 끼었다가 떨어지면서 벗겨진 부분이라고 합니다.

미륵반가사유상
보살입상처럼 높은 보관을 썼으며 상위는 벗은 상태입니다.
인도인들의 옷처럼 얇은 천을 둘렀읍니다.
오른손을 들어 턱 밑을 가볍게 괴고있는 형태인데 아깝게도 파손 되었음은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백제의 작품중에 반가사유상은 오직 이것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귀중한 것 같습니다.

우측에서 바라본 보살입상

우측에서 본 석가여래입상
요철이 실제 인물과 매우 흡사합니다.

우측에서 바라본 반유상
파손은 타종교인과격파들을 의심하더군요.

좌편에서 바라본 삼존불
옷자락 하나하나가 U자형으로 늘어진게 생동감을 불러 일으킴니다.
상체가 앞으로 너무 나왔다는 평이 있는데 실제로 15미터 밑에서 위를 처다 보았을 때를
상상한다면 왜 상체가 앞으로 굽어야 하는지 이해가 될것입니다.
![sfm_215[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47/54047/11/sfm_215%5B1%5D.jpg)
연꽃을 밟고 서 있는 석가여래의 발가락 하나하나가 뚜렸하고 발톱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상태가 경이로울 뿐입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삼존불상 위의 바위가 비를 피해주고 빗물 흐름 역시 비켜가게 설계되어
있다고 합니다.
현대 조각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렇게 정교하게 조각하기 위해서는 돌을 쪼는 공구의 금속배합기술이
발달 했어야 했고 정 날이 날카로워야 하는데 놀라울 뿐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급한 아빠는 어린 아들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면서 어서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지가 커 가면서 어련히 다 알게, 아빠보다 더 많이 알게 될 터 인데...
웬 성화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