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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과 정약용

무너미 2010. 12. 20. 10:57
정조 대왕과 정약용을 기리며 ----화성 (華城)  
 

수원 시내 한복판을 광범위하게 점하고 있는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 문화의 백미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성곽의 장점만을 흡수해 완벽하게 건설된 도시 성곽이며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 라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정조 18년 2월에 시작하여 2년6개월만에 완공된 수원성은 당대에 동원 할수있는

모든 능력과 기술을 집약 시켰던 것이다.

본래 수원의 행정청은 지금의 수원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의 화산(花山) 아래 있었다.

정조는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 하면서 수원 읍과

민가들을 옮기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팔달산 아래 지금의 수원으로 옮기고 읍명을 화성(華城) 이라 했다. 

정조는 곧 화성축성에 들어갔다.

성안에 행궁을 설치 하는 등 화성성역 이라 부르는 신도시 건설이 무르익어 갔다.

이에 정조는 일찌기 유성룡이 제시하였던 설과 유형원, 강항, 조중붕, 그리고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이 주창한 성설 (城說)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는다.

실학 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친 대역사 (大役事) 였다.

 

남인의 영수이자 정조 개혁정치의 참모였던 번암 채재공이 성역의 총지휘를 맡고 다산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 감독 했다.

특히 정약용의 발명품인 활차와 거중기가 매우 쓸모있게 사용됐다.

요즘의 크레인에 해당되는 거중기는 40여근의 힘으로 2만 5천근의 무게를 들어 올릴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공사 기간이 5분의 1 이나 단축 되었다.

우리나라 과학 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한것은 물론 이다.

 

성곽에 벽돌을 사용한것도 화성이 처음인데 돌과 벽돌을 적절히 교차시켜 쌓았다.

팔달산에 둘러싸인 계곡과 지형의 고저, 굴곡에 따라 두른 성벽은 지금 보아도 아름답다.

넓은 평지의 시가지를 포용했고 산성의 방어기능을 이 읍성에 결합했다.

상공업을 장려해 정치, 상업적 기능까지 갗추었으며 실용성과 합리적인 구조, 구조물을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배치 하는등 화성은 이때가지의 건축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게다가 우아하면서도 장엄한 면모가 일품이다.

 

사대문 사이에 암문(暗門) 4개, 수문( 水門)2개, 적대(敵臺)4개, 공심돈1개, 포루5개,장대2개, 각루4개 등

다양한 구조물을 치밀하고 규모있게 배치 하였으며 성내에는 행궁을 마련해 임금이 머무를수 있는

제반시설도 모자람없이 갖추었다.

 

정조는 성곽이 완성되자 화성축성공사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그리하여 완성된 " 화성성역 의궤"(華城城役儀軌) 에 따르면 축성 역사에 동원된 공장(工匠)은 1280명

연 동원된 일수는 37만 6342일, 축성에 사용된 벽돌은 모두 69만 5000장 이었다.

당시 동원된 공장(工匠)들에게 생활 보장이 넉넉히 될만큼의 임금이 지불된 사실도 여기서 밝혀지고 있다.

화성의 축성은 정조의효성에서 비롯된 결단이긴 했지만 정조는 개혁정치의 이상을 새로운도시 수원에서

펼치고 실현 시키고 마무리 짓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조는 수원성이 완성된 이듬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땅에 다시는 정조와 같은

현명한 왕이 출현하지 않았고, 조선은 다시 혼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누구나 한나절만 할애 한다면 유서깊은 수원성을 둘러보며 정조의 이상과 꿈의 일면을 만나볼수 있을것이다.

 

수원성은 사적 제 3호 이며 1997년 12월4일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자료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 돌베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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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의 멋진위용을 가리운 보수공사의 가림막.

수원의 상징물일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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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 관광 안내소 에서부터 나의 문화유산 순례는 시작된다.

붉은 깃발이 강한 바람에 펄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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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만난 남포루가 보이는 곳까지 올라왔다.

화성의 5개의 포루중 팔달문과 서남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적이 성벽에 접근 하는것을

막기위해 화포 (火砲)를 쏠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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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성벽과 오른쪽의 소나무 숲이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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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암문.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들키지 않게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 할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메워 폐쇄 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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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하기 짝이 없는 성곽길 산책이다.

바람이 몹시부는 매운 날씨인데도 햇빛이 아주 밝게 비춰주어서 인지, 추운 감각을

잊은듯 했다. 그만큼 나의 감정은 들떠 있었다고나 할까.

팔달산의 능선에 오른것 만도 좋은데 뺑둘러 성곽을 따라 걷는다니....

 

정조 대왕과 다산의 웅대한 꿈을 기리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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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의 종.

수원시가 1991년 11월 조성한 높이 354m 지름 215m 무게 125톤의 종으로서

유료 타종 할수 있다.

첫번째는 부모님께 감사하고, 두번째는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빌고 세번째는 자신의 발전과

소원성취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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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서 주변을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사방 100리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군사지휘 본부로 화성장대 라고도 불리운다.

한눈에 매우 아름답게 공들여 만든 건축물임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화성 행궁의 아름다운 기와집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화성행궁이나 어디에서도

서장대는 우뚝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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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노대.

쇠뇌를 쏘던 방어시설로 산 정상부에 위치 하였고 화성에는 두개의 노대가 설치 되어 있다.

이중 동북 노대는 서노대가 성벽 안쪽에 설치된 것과는 달리 치성위에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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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장대의 빼어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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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루.

화성의 5개의 포루중 서북각루와 서장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정조20년) 5월 30일 완공 되었다.

화성의 전투 지휘소인 서장대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기에 5개의 포루중 가장 중무장한 포루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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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안쪽의 아래로도 산책길이 나 있지만 나는 굳이 성벽에 바짝 붙어서 걷는것이 행복했다.

성안의 사람들 이라는 단어의 부르좌 일까? 나는? ㅎㅎ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수원시가지의 현대적인 모습.

이렇게 옛성을 끼고 사는 수원 사람 들은 정말 행복할것 같다. 매일 이길을 걸을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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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저 반달형의 옹벽이 화서문 이구나. 

홀로 걸어서 화서문이 보이는곳 까지 왔다.

몇백년의 세월이 함께 하고 있는 수원 시가지의 모습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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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젊은이들이 있는한 우리나라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수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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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4대문중 하나인 화서문.

화서문은 수원의 서쪽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네모 반듯한 큰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 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 구조도 특이 하고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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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길에서 내려와 올려다본 북서포루.

산책하는 연인들이 있어 그림이 더욱 아름답다.

그런데 깃발의 색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처음 붉은 색으로 부터 시작해서 노란색도 보았고

흰색깃발로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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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저곳이 장안문 인가보다.

검은 깃발이 휘날리는 장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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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이라고도 하고 장안문 이라고도 한다.

화성의 4대문중 북쪽 문으로 정문이라 할수 있다.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5일 완공 하엿다고.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의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 이다.

누각의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 웅장한 위엄을 주고 있으며 서울의 국보1호 숭례문 보다도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 이다.성문의 바깥에는 반원형의 옹벽을 샇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것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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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문 천정에 그려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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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으로 들어서면 또하나의 작은문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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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적대.

적대는 성문을 공격하는적을 방어하기위해 성문 좌우 옆에 있는 치성위에 세운 시설물로서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 설치 하였다.

장안문의 동쪽에 설치한 북동적대의 높이는 성벽과 같은데 밖으로 3개의 현안을 뚫고

벽돌로 쌓은 담장마다 총구멍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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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치.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밖으로 튀어나오게한 시설물로서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 하기

위한 시설물. 자기몸을 숨기고 주변을 잘 살펴 보기 때문에  꿩치(雉) 자를 써서 치성 이라고 한다

북동치는 북동적대 바로 옆에 적대와 서로 이어져 있다.

 

홍예포 라고 씌여있던 포

모텔 이라는 간판이 볼썽 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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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길은 아직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바람은 차나 햇볕 받고 걷고 있는

나는 행복하고....

저 멀리 연무대가 보이나? 또 더멀리 보이는 누각은 무엇인지.

휘날리는 검은깃발 동무삼아 성벽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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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수원천과 화홍문.

또 저멀리 보이는 방화수류정.

그러나 사진이 몹쓰게 나와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모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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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의 화려한 모습.

동북각루 라고도 불리는 방화수류정.

화성의 4개 각루중 하나로 전체 시설물중 가장 빼어난 곳이다.

방화수류정이란 꽃을 좇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란 뜻이다

뛰어난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화성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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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 주변의 연못가.

봄철 다시 한번 와서 이 모습을 꼭 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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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 포루 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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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대의 모습.

 연무대는 동장대라고도 하며 동쪽에 있는 장대로서 서쪽에는 팔달산 서쪽에 위치한 서장대가 있다.

전쟁 또는 군사 훈련시에 성내의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한 대장이 자리하는 누대(樓臺)를 말한다.

성 전체 상황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에 위치한 군사 총 지휘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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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무대의 넓은 뜰을 보니 옛날 군사들의 훈련 모습과 함성이 들리는듯 하다.

 

이곳부터 동쪽 성곽은 다음날로 미루어야 했다.

짧은 겨울 해가 지기전에 화성 행궁을 보아야 했기 때문에.

 

참 뿌듯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정조 대왕과 정약용 같은 인재 들이 우리의 선조 였다는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그러나 그런 인물들도 많은 악의세력들의 권력싸움에 밀려 얼마나 불행하게 생을 마쳤을까 생각하면

이나라 사람들의 권력욕은 이제나 옛날이나  고칠 길이 없는 것일까? 새삼 개탄스럽다.

다행히  자신의 초월적 군주상을 펼쳐보이고 싶었던 정조 대왕, 그의 웅장하고 원대한 계획의 산물인

수원화성이 천재 정약용과 만나  큰 유산을 우리에게 남기셨으니 그들의 발자취는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