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서울시장

조선시대의 서울시장
조선 시대 한성부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며 수도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던 기관이었으며 한성부의 우두머리인 판윤은 지금의 서울 시장에 해당하는데 그 실세는 영의정에 버금갔으며 또 정승이 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벼슬로서 판윤 자리를 차지하려는 벼슬아치들의 경쟁이 가장 치열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성판윤을 거쳐 간 인물들은 황희, 맹사성, 서거정, 최명길, 박문수 등 대부분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었으며 특히, 판윤을 임명할 때는 외가의 3대까지 혈통을 살펴 당파에 크게 치우치지 않는 집안의 인물만 골랐다.
영의정 되기보다 한성판윤 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며 헌종-철종 때 이가우는 34세에 급제한 뒤 열 번이나 한성판윤에 올라 "판윤 대감"이란 별명을 얻었으며 1890년 고종 27년에는 1년 동안 무려 25명의 판윤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또 임명된 날 해임된 한나절 판윤도 다섯 명이나 있는데 한성판윤의 월급은 고작 쌀 두 섬 두 말에 콩 한 섬 다섯 말이 전부였다.
한성판윤의 일과는 출근에서 퇴근에 이르기까지 행동 하나하나가 격식에 맞게 이루어졌으며 업무 자체가 단조로워 결제 건수가 얼마 없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판윤에게 결제를 받을 수 있었고 또 이때에도 판공비가 있어서 직원들에게 격려금도 주고 喪을 당한 집에 부조도 하였다고 한다.
한성판윤이 처리하는 일들 가운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민원 업무는 백성 간의 각종 분쟁, 땅이니 주택에 대한 소송사건을 해결하는 것이었으며 지금의 민사사건에 해당하는 송사를 판결하여 주었고 형사사건에 해당하는 죄수들을 붙잡아다 벌을 주는 일도 했다.
한편, 한성부에서는 3년마다 호적정리가 끝나면 정리하면서 나온 파지를 한성부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종이가 귀했던 당시에는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으며 또 한성부의 중요 업무 가운데 하나가 도성 안의 안녕과 치안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王 행차 때 경호 담당 및 환경미화, 당시에도 무허가 노점상 단속과 화재예방과 진화업무에 관여했고 특이하게 불씨를 나누어 주는 일에도 담당하였는데 조정에서 불씨를 만든 뒤 보내는 사람의 이름과 수량 등을 적어 각 관청에 보내고 한성부에도 보내 주면 한성부에서는 그 불씨로 각 房에 불을 붙이고 판윤 宅과 관리들 집으로 나누어 주었다.
한성부 관리들의 부인들은 조정에서 나누어 준 불씨를 소중히 다루어
꺼지지 않게 잘 관리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