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미 2012. 6. 19. 05:51

 

 

[가슴으로 읽는 시조] 길

 

 

길이 새로 나면서 옛집도 길이 되었다

 햇살 잘 들던 내 방으로 버스가 지나가고

 채송화 붙어 피던 담 신호등이 기대섰다

 옛집에 살던 나도 덩달아 길이 되었다

 내 위로 아이들이 자전거를 끌며 가고

 시간도 그 뒤를 따라 힘찬 페달을 돌린다.

 

                      -강현덕(1960~ )

 

 

길은 살아 있는 지도이다. 삶에 따라 변모를 거듭한다. 옛길은 새 길로 좁은 길은 넓은 길로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제 몸에 새겨진다. 그러는 동안 대부분의 곡선은 직선으로 바뀌었고, 버려진 길들은 본래의 소임을 다한 듯 슬그머니 흙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필요’나 ‘개발’ 혹은 ‘편리’라는 명분으로 길의 역사를 고쳐 쓰는 게 점점 잦고 많아진 것이다.

 

그러니 길을 가다 한 번쯤은 신호등을 유심히 보시라. 그러면 채송화가 아웅다웅 붙어 피던 담, 첫사랑을 콩닥콩닥 넘겨보던 옛 담장을 만날지도 모른다. 버스에서는 손때 잘 먹여놓은 옛 집의 앉은뱅이책상을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러다 또 돌아보면, 자전거를 끌고 가는 아이들에게 온몸을 내주며 흐뭇이 웃고 있는 자신을 문득 보기도 하리라. 그렇게 우리는 길을 만들고 내주면서, 또 다른 길이 되며 나머지 날들을 살아가리라.

(조선일보 6월 19일)

  정수자·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