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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읽는 시] 풀 잡기

무너미 2012. 10. 31. 06:45

 

 

[가슴으로 읽는 시] 풀 잡기

 

풀 잡기

 

올해만큼은 풀을 잡아보겠다고 풀을 몬다.

고추밭 파밭 가장자리로, 도라지 밭 녹차 밭 가장자리로 풀을 몬다.

호미자루든 괭이자루든 낫자루든 잡히는 대로 들고 몬다.

살살 살살살살 몰고 싹싹싹싹 몬다.

팔 다리 허리 무릎, 온몸이 쑤시게 틈 날 때마다 몬다.

봄부터 이짝저짝 몰리던 풀이 여름이 되면서, 되레 나를 몬다.

풀을 잡기는커녕 되레 풀한테 몰린 나는

고추밭 파밭 도라지 밭 녹차 밭 둿 마당 까지도 풀에게 깡그리 내주고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낮잠이나 몬다.

 

                                                           - 박성우(1971~ )

 

 

상강(霜降)이 지났다. 산간(山間)에 있는 집 마당가의 아직 푸른 채소들은 첫서리를 맞아 폭삭 내려앉았다. 때를 모른 것들이다. 어찌 아는 것일까? 야생의 잡풀들은 이미 모두 시들어서 그 눈을 뿌리 아래로 다 모으고 겨울을 맞이한다. 꼼짝 않고 겨우내 '나는 죽었노라' 하며 한철을 날 것이다. 북풍한설(北風寒雪) 속에서는 그래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마른 풀 냄새를 맡으며 지난 계절을 생각해본다. 양심상 제초제를 뿌릴 수는 없어 풀을 손으로 뽑아냈다. 하나 풀을 이길 수는 없다. 오죽하면 풀이 제 뒤를 따라온다고 할까. 그러할 때 전원생활의 낭만 운운은 말 그대로 낭만 운운이다. 풀을 이길 수는 없다. 하나 모두 때가 되면 이렇듯 시들어버리는 것을 공연히 맞싸웠다 싶기도 하다. 무상(無常)을 배운다. 내 욕망도 이러할 것이다. 괭이 내던지고 벌러덩 누워 쉬는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을 떠올려 본다.

 (조선일보 10월 31일)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