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문 중 유일하게 천장 벽화가 남아 있는 곳은?
4대문 중 유일하게 천장 벽화가 남아 있는 곳은?
서울성곽 4대문 천장 벽화이야기
[서울톡톡] 서울성곽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大門)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다. 먼저 4대문인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숙정문(북대문), 돈의문(서대문)의 홍예(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벽화를 올려다본다. 먼저 둘러본 서울궁성의 4대문은 음양오행을 따라 홍예 천장에는 주작(광화문, 남쪽), 백호(영추문, 서쪽), 청룡과 황룡(건춘문, 동쪽), 현무(신무문, 북쪽)가 그려져 있다.
서울성곽 4대문에는 어떤 벽화가 있는가를 찾아본다. 남쪽(도심의 관문) 숭례문은 2008년 2월 방화로 소실되어 현재 복구공사를 진행, 2012년 12월말 완공예정으로 벽화를 살펴볼 수가 없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찾아보니 홍예 벽화로 청룡과 황룡(발톱인 4개인 사조룡)이 그려져 있다.
북쪽(북악산에 위치) 숙정문 홍예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기에 없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그 외에 1413년 풍수지리학자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최근 시민들에게 공개된 것은 1968년 1·21사태, 이른바 김신조 사건부터 38년이 지난 2006년 4월이다.
서쪽(서대문구로 알고 있으나 현재 중구 정동 사거리에 돈의문 터가 있다) 돈의문은 1915년 경성도시개발 계획에 따른 전차의 복선화로 인해 강제로 헐렸다. 돈의문 홍예 천장의 벽화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돈의문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1396년 태조5년 한양 도성의 제2차 축성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다.
1413년 태종13년에 돈의문을 폐쇄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을 새로 지어 출입하게 하였다. 그러나, 1422년 세종4년에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하였다. 그 뒤에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1711년 숙종37년에 다시 지었다가, 1915년 강제 철거되었고 현재 옛 터 표시석만 남아있다.
동쪽(본래 동대문구에 속했으나 행정구역 조정으로 현재는 종로구에 속해 있다) 흥인지문이 현재 4대문 중에 유일하게 홍예 천장 벽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려진 벽화는 역시 청룡과 황룡이었으나 숭례문과 다른 모습이었다.
문을 기준으로 좌우에 용이 그려져 있고, 머리는 마주보고 있으나 대칭은 아니다. 북쪽에 청룡, 남쪽에 황룡이 있다.
4대문의 용 그림이 음양오행설을 따르지 않고 다르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경복궁 궁성 4대문 중 동쪽에 있는 건춘문의 천장 그림을 살펴보면 문을 기준으로 용머리가 중앙에 마주보고 있고 문 쪽이 청룡, 안쪽이 황룡이다. 서울 성곽 4대문은 각 시대에 따른 복원과정에서 다르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잠시 용에 대해 알아보면 용은 우리 겨레와 가장 친근한 상상의 동물로서 그 생김새는 몸통이 뱀과 같고 네 개의 발이 있어 매의 발톱을 가졌으며, 머리에는 사슴 같은 뿔과 등에는 81개의 비늘이 있고, 토끼 같은 눈, 소의 귀, 뱀의 목, 범의 발바닥, 큰 조개 같은 모습의 배를 가졌다고 한다.
다섯 가지의 오룡이 있는데 백룡과 황룡은 임금이나 황제를 상징하고 청룡은 사악한 귀신을 내쫓는 벽사를 뜻하며 흑룡, 여룡은 가뭄에 기우제를 올려 비를 구하는 대상이었다. 용은 전통적으로 고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왕을 용으로 비유하게 된 사연은 용에게는 인간과 국가를 보호하고 물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성곽 4대문에도 용을 그리지 않았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