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調. 童詩, 漢詩/가슴으로 읽는 한시

산을 내려와 초당에서 묵다

무너미 2014. 6. 14. 08:25

 

 

가슴으로 읽는 한시 산을 내려와 초당에서 묵다

 

與山人普應下山, 至豐巖李廣文家, 宿草堂(여산인보응하산, 지풍암리광문가, 숙초당)

산을 내려와 초당에서 묵다

 

學道卽無著 (학도즉무착)   도를 배운다는 것은 집착이 없다는 것

隨緣到處遊 (수연도처유)   인연이 되는 대로 여기저기 노닐련다.

暫辭靑鶴洞 (잠사청학동)   푸른 학이 사는 골짜기를 선뜻 떠나

來玩白鷗洲 (내완백구주)   흰 갈매기 나는 물가에 와 구경한다.

身世雲千里 (신세운천리)   천리를 떠도는 구름 같은 신세로

乾坤海一頭 (건곤해일두)   바다 한 귀퉁이 하늘과 땅에 서 있다.

草堂聊寄宿 (초당요기숙)   초당에 몸을 맡겨 묵고자 하니

梅月是風流 (매월시풍류)   매화에 비친 달, 이것이 풍류로구나.

 

-이이(李珥·1536~1584)

                           ▲김현지

 

율곡(栗谷) 선생이 스무 살 때 삶에 회의를 느껴 머리를 깎고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산을 내려왔다.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풍암(豐巖) 이광문(李廣文) 초당에 들러 하룻밤을 묵었다. 그는 자문자답한다. 왜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가? 도(道)를 배우는 것은 집착이 없는 것, 한곳에 머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져 있지도 않다. 굳이 말해야 한다면 인연이 있다는 것뿐이다. 오늘 잠시 동해안 바닷가 이 초당에 묵고 있다. 매인 데 없는 구름처럼 내일이면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너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매화나무 가지에 비친 달이라고 말하고 싶다. 청년의 방황과 패기가 행간에 스며 있다.

안대회 |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출처] 프리미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