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調. 童詩, 漢詩/가슴으로 읽는 시조
안경알을 닦으며
무너미
2014. 9. 26. 07:09
가슴으로 읽는 시조 안경알을 닦으며
안경알을 닦으며
지루한 장마 끝에 활짝 열린 청천(靑天) 같은 어둠을 쓸어간 뒤 새 아침의 쾌청(快晴) 같은 안경알 투명한 정을 나는 알고 사는가.
날마다 이맘때면 무심히 책장을 넘기다가 내 항상 버릇처럼 안경알을 닦는다만 진실로 닦아야 할 것을 나는 닦고 사는가.
―유선(1937~ ) ▲일러스트 : 이철원
안경은 이제 누구나 장착하는 신체의 일부 같다. 유치원 꼬마부터 경로당 어르신까지 안경을 낀 사람이 안 낀 사람보다 훨씬 많아진 것이다. 눈 좋다던 사람도 이른 노안(老顔)에 따라 돋보기를 늘 챙길 수밖에 없다. 작은 활자만 나오면 비밀 병기처럼 꺼내 드는 안경이 없으면 그만 앞이 캄캄해지니 말이다. 훗날 역사는 인류를 안경족(族)으로 그리지 않을까.
그래서 안경알을 닦는 것은 경건한 일이다. 그건 어쩌면 마음을 닦는 기도 같은 일과. 안경을 닦은 후 맛보는 '청천'과 '쾌청'은 보이는 것뿐 아니라 안 보이는 것마저 그렇게 만들리라. 그 순간 모든 게 환히 거듭나는 느낌! 안경이 조금만 뿌예져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그때마다 '진실로 닦아야 할 것을 닦고 사는'지 돌아봐야겠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오래된 표현이 새삼 크게 와 닿는 가을 아침.
정수자 | 시조시인 [출처] 프리미엄조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