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미 2015. 2. 13. 06:10

 

 

[가슴으로 읽는 시조] 우수절의 시

 

                  ▲일러스트 : ?

 

우수절의 시

 

한 장 창호지 밖에 나직이 듣는 음성

 

어린 날 그 언덕에 흘리고 온 꿈의 씨앗

향 맑은 귀가 열리어 이젠 움이 돋는가.

 

돌아온 산모롱이 구비 구비 짓다 둔 인연

원수도 손끝이 저려 맺힌 허물 고를 풀고

한 떨기 민들레처럼 떨고 일어나는가.

 

죄 없이도 가슴 닳던 그리움도 벗어두고

묵밭된 마음의 이랑 새로 닦은 보습을 대어

묵혔던 길이 열리어 기적처럼 오실 손님.

 

비 그치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이 밤

옥색 치맛자락을 끄는 꿈길도 결이 맑고

청매화, 새 피가 돌아 숨소리도 고르겠다.

 

박재두(1936~2004)

 

우수는 한자로 써야 제 맛이다. 雨水, 비 내리는 모습에 소리까지 겹쳐지는 묘한 울림. 긴 겨울의 끝을 알리는 소리에 봄빛을 얹어 듣기 때문이겠다. '한 장 창호지 밖에 나직이 듣던 음성'이야 옛 얘기지만, 우수절 빗소리는 꽃 소식처럼 임 소식처럼 여전히 반가운 봄의 전령이다.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 빗소리 따라 남북의 두꺼운 얼음도 풀리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면 명절에 하염없이 북녘이나 바라보던 깊은 수심도 다 풀릴 텐데. 오래된 그리움들에 '새 피가 돌아' '청매화' 같은 봄으로 피어나길 다시 또 간절히 불러본다.

 

정수자 시조시인

[출처] 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