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미 2016. 12. 26. 09:36

[가슴으로 읽는 시] 저 꽃


일러스트 : 김성규


저 꽃

 

앞으로 산책 거리 줄일 땐 어디를 반환점으로?

학수 약수터? 남묘(南廟)?

아직은 집에서 너무 지척인 남묘를 향해

일부러 이 골목 저 골목 에둘러 가다가

마지막으로 꽤 숨찬 언덕길을 오르다 만나는,

담 헐고 만든 꽃밭, 허나 다른 꽃들 자리 뜬 조그만 마당에

부용꽃.

내가 여름 꽃 하나만 그린다면

파스텔로 빛깔, 모양, 줄무늬까지 뜨고 싶은 저 꽃.

떠질까, 냉수로 새로 막 부신 듯 저 느낌?

발길 멈춘다.

작년 여름에도 그랬지.

오늘처럼 무더운 날 오후 저 꽃이 별안간

트라이앵글 소리 냈어.

이번에도 쟁! 또 한 번 쟁!

이번에도 발을 헛디딘다.

 

황동규(1938~ )

 



산책길에서 만난 여름 꽃 부용꽃. 파스텔로 본뜨듯 그대로 그리고 싶은 꽃. 찬물로 이제 막 씻은 것처럼 깨끗한 저 꽃. 폭염 속에 핀 부용화가 시인에게 쟁! 트라이앵글 소리를 내서 알은체한다. 트라이앵글 소리를 내는 부용화도 신이하지만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시인의 귀도 밝고 신기하기는 마찬가지. 아마도 시인의 마음에 신명과 환희가 넘쳐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눈송이들이 느슨한 돌개바람 타고/ 타원을 그리며 춤춘다./ 살랑대는 저 춤사위, 지구의 것 같지 않군./ 그래 은하의 춤!"이라고 쓰고, "오늘은 새들이 빛나는 보석 조각들처럼 노래한다./ 새들을 하늘에 풀어놓을 게 아니라/ 하늘을 풀어놓는다면?"이라고 쓴 것이다.

 

문태준 시인

출처 : http://new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