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미 2017. 5. 1. 09:41


[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내 나이 일흔둘에 반은 빈집뿐인 산마을을 지날 때

 

늙은 중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더니 예닐곱 아이가 감자 한 알 쥐여주고 꾸벅, 절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산마을을 벗어나서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했더니 그 아이에게 감자 한 알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

 

오늘은 그 생각 속으로 무작정 걷고 있다

 

조오현(1932~ )('적멸을 위하여', 문학사상사, 2012)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냥 웃겠단다. 못다 한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아니 살아 있으니 산다고도 한다. 시 속의 '늙은 중님'께서는 감자 한 알 받기 위해 사신단다.

 

예닐곱 아이가 일흔둘의 '늙은 중님'을 불러 감자 한 알을 쥐여주고는 꾸벅 절한다. 제 먹을 거 움켜쥐기에 다급할 예닐곱 나이에, 빈집 태반인 산마을이니 제 먹을 것도 부족할 텐데 지나가는 탁발승에게 감자 한 알을 건네는 아이. 그 예닐곱 아이가 보시와 공덕을, 자비와 측은지심을, 인연과 업을 알았을 것인가. 아이는 그 자체로 보살이고 부처다. 그러니 '늙은 중님'에게는 감자 한 알의 '한 소식'이었을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랬거니, 그런 '한 소식' 앞에서 무슨 말을 앞세울 것인가, 잃을 수밖에. 감자 한 알의 '한 소식'을 한 번 더 받기 위해 일흔둘을 넘기고도 오늘도 무작정 걸음이랸다?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출처 : http://new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