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미 2018. 1. 29. 21:04


[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많지, 많지 않다

 

많지, 많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동리(東里)는 붓을 놓으시기 바로 전

- 여행을 떠나기에도 사랑을 하기에도

책을 읽기에도 시간이 아깝다 -

세월을 내게 주셨는데

아까워서 다 쓰지 못한 시간

지금은 펑펑 쓰고 계실까 (중략)

 

많지, 많지 않다

꽃 보고 달 보고

강가나 숲길 어슬렁거리며

말도 되지 않는 말

글자로 적어내는 일도

이제 나를 떠났는데

 

- 어디 사랑할 시간을?

어림도 없다

 

이근배(1940~ )("시인수첩", 2017년 가을호)

'죽음 때문에 우리는 하루도 한가하게 지낼 수 없다'고 썼던 건 베케트였고, '늙어갈수록 작가는 더 잘 써야 한다. 더 많이 봤고, 더 많이 견뎠고, 더 많이 잃었고, 죽음에 더 다가가지 않았는가'라고 썼던 건 부코스키였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이불 속에서 뒹굴 거리는 자식들을 향해 "죽고 나면 내내 잘 텐데, 해 아깝게 뭔 잠을 그리 자냐"고 버럭 했던 건 울 엄마였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고 노래한 정현종 이전에 "여행을 떠나기에도 사랑을 하기에도/ 책을 읽기에도 시간이 아깝다"고 노래했던 김동리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 그 노래들에 의지해 사랑이나 여행은 말할 것도 없고 '내게 하마던 것들/ 알지 못하게 저질러놓은/ 허물이며 치러야 할 몸값들''벗고 갚을' 시간도 많지 않고, 시 쓰던 버릇도 떠나보내고 내가 나를 떠날 시간도 많지 않다고 노래하는 시인이 있다. 늙을수록 죽음에 다가갈수록 '많지 않은' 것 중 제일은 시간인가보다.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출처 : http://new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