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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복식 : 신발(履)

무너미 2010. 12. 2. 16:57
조선시대의 복식 : 신발(履)


금동식리.jpg

고분에서 발굴된 금동리의 모양은 모두 리(履)의 형태로 뒤꿈치는 각형으로 되어 약간 들려져 있으며, 신발바닥의 표면에는 많은 작은 영락이 붙어 있습니다. 또 이는 대부분 좌우가 동일한 모양이지만 좌우가 다른 모양도 있으며, 신의 운두에 조각이나 문양을 그린 것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리(履)

화(靴)는 목이 긴 신으로 형태상으로 방한과 방습에 적당하여 무풍적인 북방민족이 많이 사용하였고, 리(履)는 운두가 낮은 신으로 남방민족의 신발입니다. 이는 넓은 의미로는 신발을 총칭하는 것으로 단요의 신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履)에는 석, 화(靴)에 속하는 흑피화(黑皮靴), 협금화(挾金靴), 수화자(水靴子), 목화(木靴), 기자화(起子靴), 마피화(馬皮靴), 사피화(斜皮靴), 백화(白靴), 단화(短靴) 등이 있었고, 혜(鞋)에 속하는 흑피혜(黑皮鞋), 분투혜(分套鞋), 투혜(套鞋), 태사혜(太史鞋), 당혜(唐鞋), 운혜(雲鞋), 온혜(溫鞋), 발막신, 진신 등이 있었습니다.


피혁제(皮革製)

 목화(木靴)
화자(靴子)는 순전히 피물(皮物)로 만들었으나, 뒤에는 전(氈)으로 내장하고 외부는 청금선으로 둘러 화자(靴子)의 밖에 보이게 하고 고급품은 금단(錦緞)으로 꾸몄는데 무관(武官)이 착용했던 수화자(水靴子)의 모양과 같습니다.
가죽은 녹피(鹿皮:사슴가죽)를 사용하였으며, 신복이 길어 반장화(半長靴) 같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분투혜(分套鞋)·투혜(套鞋)
방한(防寒) 및 방습용(防濕用) 덧신의 일종입니다. 극한일(極寒日)의 전정조회 (殿庭朝會)와 행행(行幸) 영송시(迎送時) 또는 병이 있고 연로한 사람은 분투혜 (分套鞋)를 착용하였고, 공회시(公會時) 진흙에서 혜자(鞋子) 위에 분투혜를 신은 것으로 보아 방습용으로도 착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피초혜(皮草鞋)
피(皮)와 초(草)로 만든 것으로, 신창은 가죽이고 운두는 초(草)·마(麻)로 된 것이었습니다.

 태사혜(太史鞋)
남자 마른신의 일종으로, 사대부나 반인계급의 나이든 사람이 편복에 신었고, 조선조 말에는 왕도 평상복에 신었습니다. 울은 헝겊이나 가죽으로 하고 코와 뒤축에 흰 선문(線紋)을 새겨놓은 것이었습니다.


 발막신
마른신의 하나로, 흔히 상류계급의 노인들이 신어 '발막'이라고 하였습니다. 뒤축과 코에 꿰맨 솔기가 없고 코 끝이 넓적하였으며, 가죽조각을 대고 경분(輕粉: 염화 제일 수은의 한방 약명입니다)을 칠하였습니다.





 진신(유혜(油鞋))
들기름에 절여 만든 가죽신으로, 진땅에 신었으며 신창에 징을 촘촘히 박고 있기 때문에 '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흑피혜
검은 가죽으로 울을 대고 신코에 붉은 선을 두른 목 짧은 신으로 조선시대 1품에서 9품까지의 문무관리들이 조복(朝服), 제복(祭服)을 입을 때 신었으며 상중(喪中)에 부녀자들도 신었습니다. 남자용은 신코가 넓고 뒷축이 높은 신으로 말기(末期)에는 유생(儒生)들이 신기도 하였습니다. 여자용은 신코가 뾰족하고 높았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종류의 피화(皮靴)·피혜(皮鞋)가 애용됨에 따라 가죽이 품귀해지고 값이 폭등하였으므로 사치풍조를 없애고 신분의 확립을 위하여 피혜를 신는 것을 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의 피혜 착용이 여전한 가운데 재료로써 귀천을 구별하여 귀자(貴者)는 녹피(鹿皮), 천자(賤子)는 우피(牛皮)를 사용하였습니다.

초(草)·마제(麻製)

초리(草履)와 구가 속하고, 이것들은 피혁제(皮革製), 포백제(布帛製) 화(靴)·혜(鞋)가 발달하면서 천시되어 차차 이례하천인(吏隷下賤人)의 신이 되었고 서민층 남녀가 일반적으로 공용하였으며, 그 정제품(精製品)은 사대부간의 평복에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초리(草履)
짚신, 왕골짚신, 부들짚신, 고은짚신, 엄짚신 등의 이름이 있었다. 이 가운데 왕골(莞草(완초)), 부들(香蒲(향포)) 등을 가늘게 꼬아 촘촘히 삼은 짚신은 사치품이 될 만하여 고은짚신이라 할 만하였고, 엄짚신은 상제가 초상 때부터 졸곡 때까지 신는 짚신으로 관리(菅履) 또는 관구 라고도 하였습니다.


 
미투리하고도 하며, 삼신, 절치, 탑골치, 무리바닥, 지(紙) 총미투리 등의 이름이 있었는데, 부분적인 재료나 만들어진 고장의 이름에 따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미투리는 짚신보다는 고급품으로 재료는 삼(麻)이었으나, 사치해져 닥, 청올치 (葛根纖維), 백지(白紙), 면사(綿絲)까지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동그니신
방한용으로 신던 초제 신발이입니다.







포백제(布帛製)

가죽신에 포백(布帛) 겉을 댔기 때문에 포백제로 취급되는데, 피혁제(皮革製) 가운데 태사혜(太史鞋), 여자용 당혜(唐鞋), 운혜(雲鞋), 사라능단혜(紗羅綾緞鞋)도 여기에 속하였습니다.
궁혜(宮鞋)·당혜(唐鞋)·운혜(雲鞋)는 형태가 같은 것으로 안은 융같은 푹신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여러 색으로 화사하게 비단으로 백비하여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징을 군데군데 박은 것이었는데, 궁혜는 궁중용 (宮中用)이었고, 당혜는 코에 당초문(唐草紋)을 놓은 것으로 양가 부녀(良家 婦女)들이 신었으며, 운혜는 코와 뒤꿈치에 운문(雲紋)을 놓은 것으로 제비부리같이 생겼다 해서 일명 '제비부리신' 이라고도 하여 일반 여염집 부녀들이 신었습니다.

당혜          운혜
당혜.jpg 운혜4.jpg

유제(鍮製)

놋쇠로 만든 신으로 유혜(鍮鞋) 또는 놋신이라고도 하며, 일반화된 것이 아니고 특수층에서의 비올 때 신는 신으로 생각됩니다.





지제(紙製)

지(紙)총미투리도 지제의 일종이며, 우리나라 천자(賤者)의 혜(鞋)는 한가지가 아니어서 승혜(繩鞋:미투리), 초리(草履:짚신), 지구 등이 있어, 하서인(下庶人)들의 신이었고 점잖은 층에서는 신지 않았습니다.

목제(木製)

이것은 목극(나막신)으로서, 옛날에는 '겪지'라 하였고 근래에는 '나막신'으로 통칭되었습니다. 목극은 시골의 청빈한 선비가 신는 것이고, 우청(雨晴)·조습(燥濕) 즉, 비오거나 맑거나 건조하거나 습할 때 통행하는데 오래 견디고 헤어지지 않아 목극을 이(履)의 최고의 것이라 하였습니다. 목극이 성행한 것은 진(晋)에서부터였고, 우리나라는 선조대(宣組代) 임진란 전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신었지만, 천자(賤者)나 어린자는 존귀한 사람 앞에서는 감히 착용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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