碑(비).종(鐘). 國寶

國寶 3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이 비(碑)는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왕(王)의 국경순수기념비(國境巡狩記念碑)의 하나로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에 세워졌던 것이며,
삼국시대(三國時代) 금석문(金石文) 중 가장 유명하고 귀중한 것이다.
1400여년의 오랜 풍우(風雨)로 그 비신의 보존이 어려워
이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1972년 8월 25일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國寶 198호 단양신라적성비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國寶 205호 중원고구려비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國寶 25호 신라 태종 무열왕릉비
(新羅太宗武烈王陵碑)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1
이 비석(碑石)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원년(元年)(661)에
무열왕(武烈王)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지금은 비(碑)의 대석(臺石)이었던 귀부(龜跌)와
비신(碑身) 위에 얹혔던 이수(이首)만이 남아 있다.

國寶 64호 법주사석연지
法住寺石蓮池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법주사
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 중의 하나이다.
동자주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石欄干) 동자주와 유사하다.
연지의 조법은 정교하고 풍성하고 화려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대표가 될 만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國寶 7호 봉선홍경사사적갈비
(奉先弘慶寺事蹟碣碑)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 320
봉선홍경사지(奉先弘慶寺址)가 있었던 곳은 인가(人家)도 드물었으며
잡초가 우거져 가끔 도적이 출몰하여 행인이 곤란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고려(高麗) 현종(顯宗)은 창사(創寺)를 명(命)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을 감독으로
동왕(同王) 12년(1021)에 200여칸을 완공하였다.
비를 세운 연대는 절을 세운 지 5년 뒤의 일이다.

國寶 8호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聖住寺郎慧和尙白月보光塔碑)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이 석비는 신라(新羅) 헌덕왕(憲德王) 때 당(唐)나라에 수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郎慧和尙) 무염(無染)(801∼888)을 위해 세워진 탑비로
전체높이 4.55m, 비신높이 2.52m, 너비 1.5m로
신라시대의 비석으로는 최대(最大)의 것이다

國寶 280호 성거산천흥사동종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m, 종 입구 0.96m이다.
유곽 바로 아래에는 위패형의 틀을 설치하고
그 속에 글을 새겨,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주조되고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國寶 29호 성덕대왕 신종
(聖德大王 神鍾)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은 부왕(父王)인
성덕왕의 위업(偉業)을 추앙(推仰)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이 대종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동왕(同王) 7년(771)에 이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다.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施主)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俗傳)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왔다.
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東部洞) 구박물관(舊博物館)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25∼11cm,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國寶 120호 용주사 범종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