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떠나는 길.
素石 김진우.
인명(人命)은 재천이라는데 스스로 생(生)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사연이야 다 각각이겠으나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그 짐이 생의 본능을 짓누른 탓이다.
종교적 신념으로 내세(來世)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죽음은 슬프고도 두려운 것이다.
그것을 남들이 추측하며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이 목표를 잃으면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된다. 그래서 전쟁중에는 자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살아야 한다는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살예방을 위한 우울증치료는 의학적인 접근보다는 가시적인 삶의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흔히 주문하는 사랑과 관심, 물론 중요하지만 설령 진홍(眞紅)같은 사랑일지라도 그걸 내 보이고 증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울증 치료에 흔히 처방하는 <프로잭>이나 <택슬>은 세라토닌 촉성제(serotonin booster)로서 복용할 때 자살충동이 증대되는 부작용이 있다. 미국 FDA에서는 2007년부터 그 경고문을 부착하도록 의무화 하였다.
삼성 3세의 두 번째 자살을 보면서 행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은 게 문제다. 때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도 정작 본인은 그것의 소중함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서로간의 가치관의 불일치에서는 오는 불협화음 탓이다.
삼성과 동아그룹 간의 결혼, 그 결혼식장의 하객들의 숫자가 짐작된다. 그러나 그 성대한 결혼이 행복을 창출해 내지 못한 것 같다. 일이 잘 풀릴 때는 문제가 없던 가정도 사업이나 건강에 이상이 오면 삐걱대기도 한다.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냥 굴러가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조강지처(糟糠之妻)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초례(醮禮)를 치른 부부 사이라는 말이 아니라 가난할 때 험한 음식으로 함께 끼니를 때운 부부 사이를 말한다. 때문에 중년을 넘어서 만난 부부일지라도 어려울 때 만난 사이라면 그게 조강지처이다.
경제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한쪽이 건강을 잃었을 때도 역시 대입할 수 있다. 조강지처에서의 ‘처(妻)’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인생은 한편의 서사시(敍事詩)라고도 한다. 굳이 인생을 한편의 시(詩)로 비유해야 한다면 서사시 보다는 서정시(抒情詩)가 맞는다. 서사시는 작가의 감성을 떠나서 객관적인 서술형식이고 서정시는 자아의 감정을 주관적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행로(行路)는 다 본인의 주관에 의하여 그 족적(足跡)을 만든다. 때문에 사람은 출생 이외는 거의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이라 말한다. 죄를 짓고 안 짓고는 본인의 선택이고 그 결과는 당연히 본인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을 할 것인가?” (If today were the last days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33년간 매일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라 한다.
일상적(日常的)으로 매일 이런 자문(自問)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참고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특히 내세(來世)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더 그렇다. <한번 구원(救援)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현대판 면죄부(免罪符) 신앙은 달콤한 말 만큼 비 성경적이다.
이날 발인식에는 유가족 외에도 적지 않은 지인들이 참석했다. 빈소가 마련되지 않다 보니 발인식 만이라도 지켜보겠다는 지인들이 몰려 든 것.
새한 미디어 재직 당시 고인과 함께 일했던 한 여성은 "전날 장례식장을 찾았지만 빈소가 마련돼 있지 않아 다시 왔다"며 "인자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며 울먹였다.
고인과 디지털 미디어에서 함께 일했다는 한 중년 남성 역시 안타까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항상 앞선 사고로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던 사람이었다"며 고인을 선구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위의 기사는 고 이재찬씨의 발인식에서의 신문기사의 일부이다. 임종(臨終)은 화해와 용서의 마지막 기회라 한다. 그는 그 기회를 포기하고 떠났다.
그러나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라도 진심을 알아 주는 이가 있다면 그 삶은 외롭지 않다’는 말이 있으니 기사에 나온 두 문상객의 증언만으로도 그는 슬프게 떠났지만 영혼은 외롭지 않았을 것이라고 결론을 해 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冥福)을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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