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 봉안관의 형의 위패 나는 국립 현충원 봉안관에 모셔진 형(兄)을 추모하기 위하여 추석 차례가 끝나자 국립 현충원을 찾았다. 형의 나이19세 때 6.25 전쟁이 났고 그해 7월 초 마을 이장의 지시에 따라 읍사무소에 간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생별여사별(生別如死別)이 된 셈이다.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전쟁에 나가서 전사한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립문을 닫지 않았고 새벽마다 정안 수 떠 놓고 빌다가 저 세상 가신 어머님 그 세상에서는 형을 만나 보았는지요?
60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언제 전쟁이 사라지고 지속적인 평화가 올수 있을까?
봉안관은 현충탑이 세워진 지하에 있는데 입구에서 보면 거대한 흰 대리석 조각상이 놓여 있고 양쪽 검은색 대리석위에는 계급과 이름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다. 위패 앞에는 조화가 가득 놓여있다 봉안관에는 전쟁당시 전사자 중 시신을 찾지 못한 병사들의 위패와 시신은 찾았으나 이름을 알 수 없는 호국용사들의 유해가 모서져 있다. 10만 4천여위는 현충탑내 위패 봉안관에 위패로 봉안 되었고, 시신은 찾았으나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7,000여 무명용사는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6.25는 점점 우리의 뇌리 속 에 잊혀 진 전쟁으로 퇴색되어가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6.25 전쟁 때 15세였으므로 그 참상을 알고 있다. 1950년 미명(未明)의 일요일 38선 전역에서 포성이 울려 퍼졌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기까지 장장 3년여에 걸쳐 우리의 금수강산을 피로 물들게 한 처절한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침공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국가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직면 했을 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 한 역사적인 전기가 된 것이다. 그 당시 맥아더장군의 작전대로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한때 남북 간에 화해무드가 이루는듯하더니 그것은 그때 잠시뿐 그들의 본질은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조공(朝貢)을 바쳐야만 하는가? 평화를 위장한 나약한 지도자들이 한심스럽다.
천안함 폭침 같은 배은망덕한 행위로 냉각기류가 흐르고 전운이 감돈다. 북한 수해 지원한다고 쌀과 구호품을 대형 추럭에 실고 가는 모습 이건 아니다. 아무리 동포애라 해도 사과 받을건 받고 처리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돌아 오는 길 한강철교 위를 달리는 지하철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고 밑으로는 우리민족의 애환을 담은 한강이 어제의 폭우로 흙탕물이다 그래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현충탑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충의와 희생정신을 추앙하면서 동,서,남,북 4방향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닌 十(십자)형으로 된 서울현충원을 상징하는 탑이다. 이 탑의 앞쪽에는 오석평판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제단 뒤쪽에는 헌시가 오석에 새겨져 있으며 제단 앞에는 향로와 향합대가 놓여 있다.
탑의 좌우에는 화강암 석벽이 펼쳐져 있으며 좌측석벽 끝에는 5인의 애국투사상이, 우측석벽 끝에는 5인의 호국영웅상이 각각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 또한 탑의 내부에는 위패봉안관이 있고 위패봉안관 지하에는 납골당이 설치되어 있다. 이 탑은 화강암 돌붙임 공법으로 1년여간의 공사 끝에 1967. 9.30. 준공 되었으며, 탑의 높이는 31m이다.
현충탑 제단 오석에 새겨진 헌시는 이은상 선생이 지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한 헌시(일명"현충시"라고도 함)가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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