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장 에드워드 킹(Edward King)장군이 일본군 대령 앞에서 바탄반도에 있는 필리핀군과 미군병력의 항복절차를 묻고있다.

필리핀주둔 미군사령관 외인라이트(Wainwright)장군이 일본 통역장교가 보는 앞에서 코레히도루섬이 점령당했으니 모두 항복할것은 방송하고 있다.

425m 코레히도르섬 마닐라 터널에 숨어있었던 미군과 필리핀군들이 손들고 투항하는 중이다

'바탄반도 죽엄의 행군(포로 수용소로 가는)'을 떠나기 전에 몸수색을 하고 지닌 물건을 모두 압수했다.
미군포로중에 한사람은 노틀댐대학에서 축구선수로서 손가락에 끼고있던 1935년 대학졸업 반지를 빼앗겼던 것이다.
후일 일본군 장교가 다시 반지를 돌려주면서 자신은 1935년 UCLA를 졸업했다고 했다.
![pi3[1].jpg pi3[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47/54047/17/20101214_124117_97357574d11768bf9016a7c838101743.jpg)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미군들의 모습을 일본군 화가가 그린 모습.
수용소까지 끌려 가는동안 뒤로 손이 묶인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Samuel Stenzler, Frank Spear, and James Gallagher.
![bataan%20death%20march[1].jpg bataan%20death%20march[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47/54047/17/20101214_124328_bc3653cbcc6723dd1568265dad84fdba.jpg)
먹지도 못하고 굶주린 상태에서 '바탄반도 죽엄의행군'을 마치고 포로수용소 '오다니엘'캠프에 도착하고 있다.
막사 주변은 황량해서 먼지가 날리고 말라리아, 이질같은 점염병이 창궐했다.
영양실조와 일본군의 잔인무도한 행위로 하루에 평균 400명씩 죽어 나갔다
. 
오래동안 굼주린 '더치' 포로들.
후일 그들이 말하는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옆에서 눈 뜨고 죽어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 이었다고 한다.

해군창에서 은퇴한 롸저스(Lee Rogers)와 지뢰전문가 존 토드(John Todd)가 포로생활에서 몸상태가 얼마나 처참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마닐라 항만 입구에 설치되어있는 거대한 대포앞에서 일본군의 승리을 알리는 사진을 찍어 본국으로 보냈다.

필리핀 꼭두각시내각이 일본점령군 '마사하루 홈마'중장 환영식에서 일장기를 흔들고 있다.

일본정부로부터 지명된 필리핀 대통령 호세 라우엘(대법워 판사)이 다까키 와치소장과 축하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일본군은 스스로 필리핀에게 독립을 열어주었다면서 기념 퍼레이드를 벌리고 있다.
국회의사당앞을 지나 1943년 10월 14일 새롭게 조성된 독립문을 지나고 있다.
거리에는 많은 군중들이 모여 구경하고 있다.
![jia1_cartoons[1].jpg jia1_cartoons[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47/54047/17/20101214_124612_adc56e2d659efdf5e6be9584c6c1d856.jpg)
일본이 성냥갑에 그려넣은 선전문들

웨이크섬에서 포로가 된 해병대사령관, 중앙이 James Devereux중령, 샹하에에서 잡혀온 친구 세사람에게
수용소소장이 라디오를 선물한 다음 사진을 찍었다.
실제로 라디오는 일본방송만 들을수있게끔 채널이 고정되어있다.
일본 선전용잡지에 실린 사진이다.
오늘날 북한이 감행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일본한테서 배워온것 같은 인상을 준다.
많은 군중이 모여있는 마닐라광장에서 일본의 승승장구를 선전하고 있다.

대학교 담장에는 일본 점령군 사령관의 포고문이 걸려있다.
민간인들은 12항목의 꼭 지켜야 할 계명이 있는데 일본군을 보면 90도 각도로 절을 해야한다는 것과 어두워 지면 반드시 등불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계명은눈길을 끈다.

마닐라거리에서 무료 의료활동을 펼치고 있는 일본 점령군들.
이 사진은 어디까지나 선전용이고 실제로는 목화와 식량등 여러가지 물품을 공출 해 가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굶주리고 못입는 현실이었다.

일본군의 만행은 강제로 여성들을 범하거나 일본군이 지나가는데 90도 각도로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뺨을 때리기가 일수였다.

미국민간인들은 마닐라 근교에 있는 '싼토 토마스'대학에서 수용소생활이 시작되었다. 3500명이나 되는 민간이 포로들에게는 6개월이 지나도록 식량배급이 지급되지 않았다. 잘 아는 필리핀 친구들이 식량을 공급해 주고있다.

'싼토 토마스'대학 수용소는 식량뿐만 아니라 수도물 공급도 열악해서 교정에 목욕탕을 설치 해 놓고 공동으로 이용하고 있다.

일본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에서 필요한 것은 피복이다.
사탕수수농장에 목화재배를 위하여 목화씨 부리는 것을 확인, 감독하고있다.
맥아더장군은 지난 3년동안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하여 싸웠다.
1944년 10월 20일 필리핀 루손섬에 상륙하는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