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死六臣)의 묘 ..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사육신 (死六臣)
1456년 (세조 2),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6명의 신하 즉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愷), 하위지(하위지), 유성원(유성원), 유응부(兪應孚)를 말하는데 ,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이 이들 여섯 신하의 전기인 육신전(六臣傳)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들 중 무신인 유응부를 제외하면 모두가 집현전 학사(集賢殿 學士)출신으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았고, 문종으로부터는 나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해 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은 신하들이었다. 후일 세조는 이 사건에 집현전 학사들이 주동이 되었다 하여 집현전을 혁파한다.
이 사육신 이외에도 권자신(權自愼) 등 70여명이 이 사건으로 처형되었으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성삼문, 박팽년 등을 난신(難臣)이 아닌 충신으로 평정하기를 건의하는 상소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511년 (중종 6)에 그 동안 발간이 금지되었던 추강집(秋江集)이 인출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사육신 문제가 정치적으로 용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691년 (숙종 17)에 모두 관직이 복구되고,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묘우(廟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함으로써 국가적인 公認이 이루어졌다. 실로 235년만의 공인이었다.
수양대군과 사육신 ... 결국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 ?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文宗이 병약하여 재위 2년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세종시절의 안정된 왕권과 정치는 크게 약화되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의 議政府 大臣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수양대군은 권람,한명회등을 동원하여 황보인,김종서등을 추살(椎殺) 또는 주살(誅殺)하고,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安平大君도 모반의 죄를 씌워 강화도로 축출한 뒤 사사(賜死)하였다. 그리고 후환을 막기 위하여 김종서의 부하인 이징옥(李澄玉)을 파면하지만, 이징옥은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키지만 곧 진압된다.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병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하며병권을 포함한 전권을 독차지하였다. 단종은 압력에 굴복하여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준다.여기까지는 수양대군의 권력욕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는 황보인,김종서 등의 전횡에 왕권을 회복하려는 수양대군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세종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정치 참여를 희망하던 集賢殿의 儒臣들은 자신들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들이 수양대군의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방관하며 묵인하였다. 그들이 꿈꾸어 왔던 유교정치는 일부 중신들의 권력독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성삼문 등도 처음에는 功臣으로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의 專制權을 확립하려는 世祖와 관료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집현전 출신의 학사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1436년 세조는 관료지배 체제인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를 폐지하고, 王의 親權 체제인 육조직계제(六曺直啓制)를 실시하게 된다.
世祖..해인사 보관
이러한 세조의 조치는 세조의 찬탈행위를 곁에서 도와준 일부 측근세력을 제외한, 전,현직 집현전 출신 유신들에게는 단종을 복위시켜 관료지배체제를 구현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世祖의 不義의 찬탈을 명분으로 삼으며.....
세조는 사육신 사건을 마무리한 후, 집현전 유신들의 유교적 이상주의가 왕권 강화에 저해된다고 생각해 집현전을 혁파하게 된다.
이 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 성씨지묘, 이씨지묘, 유씨지묘...라 새겨진 표석이 서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뒷 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잇었는데 이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의 묘라고 알려져 왔었다.
그러다가 1679년 숙종이 노량진에 열무(閱武)하러 가면서 유사(유司)에 명하여 육신묘(六臣墓)를 봉식(封植)하였고, 1691년에는 관원을 보내 육신묘에 제사를 지냈다. 이어 육신의 관작(官爵)과 시호(諡號)를 다시 내렸다.
1782년 正祖는 사육신의 충절과 장렬한 의기(義氣)를 추모하기 위하여 신도비를 세웠다.
1954년 서울市가 이 곳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6角의 시육신 묘비를 세웠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世祖는 1456년 6월 5일 주모자의 처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 대명률(大明律)에 의하여 대역(大逆)과 모반(謨叛)의 죄는 그 수법과 종범(從犯)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능지처사(능지처사)할 것.
○ 그 아버지와 아들 가운데 16살이 넘은 이는 모두 목을 졸라 죽일것.
○ 그 아들 중에서 15살이 안된 이와 그 어머니, 딸, 아내, 첩, 할아버지, 손자, 자매 그리고 아들
의 아내와 딸은 모두 공신(功臣)에게 주어 노비(奴卑)로 삼게 할 것.
○ 80살이 넘은 노인과 병을 앓아 곧 죽게 될 이와 여자로서 60살이 넘은 노파와 앓아서 사람 구
실을 못 하게된 이는 연좌제(連坐制)를 면제할 것.
○ 백부, 숙부, 형제들의 아들들은 3천리 밖으로 귀양보내어 안치(安置)시킬 것.
○ 연좌(連坐)된 사람으로서 동거하지 않은 이의 재산은 그대로 둘 것.
○ 딸 가운데 이미 혼처가 정해졌거나, 자식이없는 사람의 양자로 들어 갔거나, 남의 집 딸로서
시집을 오기로 되어있으나 아직 성례(成禮)하지 않은 이는 덤으로 연좌시키지 말 것.
성삼문 (成三問. 1418~1456 )의 묘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 낳았느냐? "고 세번을 묻는 소리가 들려 이름이 삼문(三問)이 되었다고 한다. 성삼문이 37세에 죽으면서 그의 온 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데 .. 아버지, 세 동생, 네 아들이 모두 죽는다. 남은 가족도 없고, 누구도 무서워 그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는데, 홀연히 나타난 생육신 김시습(金時習)이 시신을 거두어 이 곳에 묻었다고 한다. (근거있는 얘기는 아니다)
그가 처형장에 끌려 가면서 詩를 남긴다 절명시(絶命詩)이다.
격고최인명 擊鼓催人命 처형장의 북소리는 생명을 재촉하고
서풍일욕사 西風日慾斜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는구나
황천무객점 黃泉無客店 황천가는 길에는 주점도 없다는데
금야숙수가 今夜宿誰家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잠을 자볼까....
그리고 처형장에 끌려가며 또 하나의 詩를 남기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 갈 때, 여섯살된 그이 딸이 따라오며 울부짓으니, 뒤 돌아보며 " 사내 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 하고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하였다.
수레가 잠시 머물렀을 때, 그의 하인이 울면서 술을 올리니, 몸을 숙여 받아 마시고, 그의 충정(忠節)을 다음과 같이 詩로 나타냈다.
식인지식의인의 食人之食衣人衣 남의 밥, 남의 옷을 먹고 입으니
소지평생막유위 素地平生莫有違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수 가 있으랴
일사고지충의재 一死固知忠義在 이 죽음이 충과 의를 위함이기에
현릉송백몽의의 顯陵松栢夢衣衣 현릉(文宗의 능) 푸른 송백, 꿈에서도 못 잊으리
성삼문의 묘라고 알려진 곳이 전국에 3군데이다. 이 곳 노량진, 충남 논산 쌍계사 옆 그리고 그으 고향 충남 홍성군 노은리... 충남 홍성에 있는 것은 아마 그의 부인이 그의 유품을 수습하여 위패와 함께 모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부 기록에 차이는 있지만, 성삼문은 거열(車裂)의 극형을 받았다. 지금의 노량진 부근에서 네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팔다리를 각각 묶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는 벌을 거열형(車裂刑)이라고 한다.
그 것도 부족하여 世祖는 본보기로 보여 주기 위하여 갈기갈기 찢어진 성삼문의 시신을 가지고 전국을 돌게 하였다, 아마 논산에 있는 묘는 성삼문 시신(屍身) 중 일부가 묻혀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일지총(一肢塚)이라고 한다.
성삼문이 37세에 죽어 시신(屍身)은 갈기갈기 찢겨 전국으로 흩어지고, 제사도 모실 자손이 없자 그의 부인 김씨는 자신의 손으로 밤나무를 깎아 신주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부인도 죽자, 외손되는 박주가 홍성에 단(壇)을 쌓아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홍성에 또 하나의 성삼문 묘가 잇는 연유이다. 홍성에는 부인과 그의 부모 성승(成勝)의 묘가 초라하게 있다.
유성원 (柳誠源. ? ~1456 )의 묘.
단종 9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는다. 이 일로 유성원은 世조의 협박에 의하여 정난(靖亂)의 공신들을 녹훈(錄勳)하는 교서(敎書)를 쓰게 되는데, 유성원은 이 사실을 내내 부끄러워하다가 사육신의 모의에 가담한다.
그는 사육신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성균관에서 듣고 그길로 집으로 간다. 부인과 마주 앉아 술을 나눈 후 사랑채로 가서 조상께 절하고 스스로 칼을 찔러 자결하였다.
백산공해 마천령 白山拱海 摩天嶺 바다를 끌어 들인 마천령 산맥에
흑수횡곤 두만강 黑水橫坤 豆滿江 땅을 가로지르는 두만강이여
차지이후 비기처 此地李侯 飛騎處 이 곳에서 이후는 힘찬 말 달려놓고
잉간호로 자래항 剩看胡盧 自來降 오랑케 항복 받던 그 모습 눈에 선하네...
하위지 (河緯地. 1412~1456)의 묘
號는 단계(丹溪)이며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예조참판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수치로 여겨 그 해부터의 녹(祿)은 취하지않고 별실에 모아 두었다. 그는 직언을서슴치않았는데, 세조가 왕권강화를 위하여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六曺直啓制)를 취하자,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니, 세조는 그의 관(冠)을 벗기고 장(杖)을 치기도 하였다.
경북 선산에 있는 하위지의 의관묘(衣冠墓)..옷과 모자만...
추강집(秋江集)에서 생육신 남효온은 하위지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말이 적어 그가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대궐 앞을 지나 갈 때에는 항상 말에서 내렸으며, 길바닥에 물이 고였더라도 그 것을 피하기 위하여 금지된 길을 가지 않았다. "
하위지의 글씨
1681년 숙종은 사육신 묘역에 그들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民節書院)을 세웠는데,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지금은 그 주춧돌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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