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DSC07635.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7ee337071.jpg)
봄이 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저 수양버들마냥 늘어진 벚나무엔 벚꽃이 만발
하리라...덕수궁은 그때가 가장 좋았다. '피카소와 모던아트'전을 관람한 후,
겨울 덕수궁을 둘러보았다.
![[편집]DSC07629.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7f0555e7f.jpg)
덕수궁 미술관은 덕수궁 서관이란 명칭으로 1936년 착공 1938년 완공한 건물이다.
서관과 동관을 잇는 석조회랑이 단아하다.
![[편집]DSC07603.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7f1103964.jpg)
이 석조전은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큰 규모의 건축이었다.
광무 4년(1900)에 착공하여 융희 3년(1909)에 준공한 석조 건물로 대한제국 때,
외국사신을 접견하기위한 곳이었다. John Mcleavy Brown이 발의하여, 1897년~1899년까지 건축계획을 세우고, 영국인 J R Harding이 설계했다고 한다.
리노베이션중인 석조전 둘레에는 건축당시의 연보와 원래의 내부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편집]DSC07631.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7f27e3dd2.jpg)
1910년 원래 모습 사진. 건물 외관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정면에 있는 기둥의 윗부분은 이오니아식으로 처리하고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편집]DSC07630.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80ab45457.jpg)
전체는 3층인데 1층은 접견 장소로, 반지하층은 시종인들의 대기 장소로 사용되었고, 2층에는 황제가 거처하였다.
![[편집]DSC07637.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7fa405e80.jpg)
-준명당,
사적 제124호의 덕수궁은 본래 왕궁이 아니었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편집]DSC07638.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7fb193991.jpg)
선조는 의주로 피난갔다가 한양으로 환도한 뒤 덕수궁에 거처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부르고 7년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만을 유폐시켰다
![[편집]DSC07641.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7fbebc1f4.jpg)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의하고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 270년 동안은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1897년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있다가 환궁하면서 이곳을 다시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다시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규모도 다시 넓혔다.
고종 황제는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후, 왕궁을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도 이곳에 거처하였는데, 이때부터 고종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요즘와서는 경운궁이라는 본래의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편집]DSC07649.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80c67d7c9.jpg)
이제 새단장을 끝낸 정관헌에 들어섰다. 덕수궁내에서 석조전과 함께 가장 이국적인 건물,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한 로마네스크양식의 훤한 공간.
![[편집]DSC07648.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8117b3c1a.jpg)
![[편집]DSC07643.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80d3dd0d4.jpg)
고종황제가 커피를 마시며 잠시 세상의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던 곳,
정관헌과는 별도로 서울 최초의 궁궐밖 커피숍이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내려가면 있었다. 손탁호텔 내에 있던 '정동구락부'가 최초 다방이었다.
덕수궁에서 고종의 커피시중을 들던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처형인 프랑스계
독일여인 손탁으로 32세 과부였다.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미스 손탁은 타고난
사교성과 능숙하게 익힌 한국어로 민왕후는 물론 고종과도 거리낌없이 차시중을
들고 담소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후 그녀는...
서울 중구 정동 29번지의 왕실 소유 땅 184평을 하사받아 이곳에 2층 양옥을 세우고 '손탁호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손탁호텔'에 ‘정동구락부’라는 살롱을 꾸며 커피를 판 곳으로 이곳이 최초
![[편집]DSC07645.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80e363792.jpg)
내부를 걸어본다. 오래전 여기서 차를 마셔보긴 했었다.
이 날은 대한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날이었다.
![[편집]DSC07647.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80f2a7033.jpg)
<정관헌은 고종황제께서 차를 즐기시고 음악을 들으시던 곳으로 동양 및
서양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재입니다. 귀중한 문화재가
훼손되지 않도록 관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안내판.

실내화를 갈아신고 입장할 것과, 음료나 음식물을 가지고 들어가지 말것이며,
어린이들이 조용하도록하는 부탁도 적혀있었다. 몇년전엔 이 건물이 너무 황페해
보였던 적도 있었으니, 적절한 부탁 말씀이다.
![[편집]DSC07653.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8182ab505.jpg)
덕수궁은 구한말 비운의 황제 고종이 일제의 압박으로 양위를 강요당하고, 한 많은 여생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2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일제에 의해 독살당하여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3·1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곳이다.
![[편집]DSC07651.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81959f33f.jpg)
![[편집]DSC07654.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81a8ccee3.jpg)
![[편집]DSC07655.jpg](http://blog.joinsmsn.com/usr/l/ib/liberum/1102/re_4d5881c09e7a8.jpg)
수문장 교대식, 청년들도 달달 추워보이는 이가 있었다.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원래는 大安門, 이 평화가 세세 오래 계속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