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킨 자 그리고 도망간 자
1950년 6월 28일, 적에게 김포읍이 피탈당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소사읍(현재 부천시)으로 후퇴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이하 김포사)'는 읍사무소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밤새워 대오를 수습하던 중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퇴와중에 사령관 계인주 대령이 실종된 것이었는데, 그 어느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지휘소를 설치하였던 소사읍사무소 (현 부천시 심곡본동 신한은행) ]
국군지휘부는 이런 황당한 소식을 보고받고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무릅쓰고 한강교를 폭파하는 초강수를 두며 적의 남진을 막고자 했지만 이미 적 6사단은 한강하구를 도하한 후 김포반도를 석권하고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들에 의해 영등포나 시흥이 조기 점령당한다면 아군의 퇴로는 순식간 차단될 위기였는데 이를 최 일선에서 막아내어야 할 부대가 바로 김포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다리를 끓었지만 이미 적군은 한강을 도강한 상태였습니다 ]
김포사는 무주공산으로 방치된 김포반도에 상륙한 적을 막기 위해 6월 26일 남산학교(정보학교)장이었던 계인주를 사령관으로 기갑연대 1장갑 수색대, 3도보 수색대, 8연대 3대대, 12연대 2대대, 15연대 1,2대대, 22연대 3대대, 18연대 2,3대대, 보국대대, 남산학교, 공병학교의 병력을 모아 창설한 부대였습니다. 이처럼 급조되다보니 일사분란하게 통합 지휘할 지휘부의 역할이 컸는데 사령관의 갑작스런 부재는 그래서 치명적이었습니다. [ 당시 국군의 귀중한 자원이었던 독립 기갑연대 소속 M-8 장갑차도 김포사를 지원하였습니다 ]
결국 3사단 참모장인 우병옥 중령이 신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김포사는 즉시 김포공항 탈환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미군의 참전이 이루어진다면 김포공항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국군지휘부의 명령에 따른 작전이었습니다. 작전 초기에는 비행장에 돌입한 전초부대가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국군을 구출하여 본대와 합세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지만 압도적인 적에게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였습니다. [ 1950년 7월 초에 촬영된 김포공항 ]
그러나 비행장 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일선 장병들은 적의 공세에 굴하지 않고 처절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선봉에 섰던 안영작 대위, 강문헌 대위, 김일록 중위, 박영수 소위, 김수동 소위 등의 중간 간부들이 전사하였고 현장에서 이들을 지휘한 김포사 참모장 최복수 중령은 단신으로 기관총을 거치한 지프차를 몰고 비행장을 질주하여 적진을 유린하다 장렬히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 장렬히 생을 마감한 최복수 중령 ]
이처럼 부하들이 장렬하게 전사하였음에도 작전이 실패하고 부대가 와해된데 죄책감을 느낀 사령관 우병옥 중령은 공항이 내려다보이는 원미산 중턱에서 권총으로 자결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김포사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경인가도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부대가 시흥전투사령부에 흡수되어 해체되는 7월 4일까지 치열하게 적을 물고 늘어져 남진을 저지하는 투혼을 발휘하였습니다. [ 원미산에서 바라 본 개화동 방면
반면 전투 2일 만에 행방불명된 계인주가 나타난 곳은 어처구니없게도 부산이었습니다. 그는 전황이 불리하고 육군본부가 수원으로 이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하여 부대를 무단이탈하여 식구들을 데리고 도망갔던 것입니다. 그의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또한 패배의 굴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결하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겁한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한 것이었습니다. [ 팔미도 투입 직전 영흥도에서 촬영된 특공대 (우에서 3번째가 계인주) ]
헌병대에 체포된 계인주는 재판에서 총살형을 언도받았지만 인천상륙작전 당시 첩보요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 해군정보국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풀려나 팔미도 작전에 투입되어 수훈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인주가 비겁하게 도주하였던 행위는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팔미도 작전은 굳이 그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지만 김포사를 내팽겨 친 행위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 계인주의 도주 행위는 비난받아야 마땅한 행위였습니다 (뒤돌아 본 이) ]
역사를 보면 최복수 중령처럼 끝까지 저항하며 자신의 의무를 다한 사람도 있고 우병옥 중령처럼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인물도 있지만, 계인주처럼 자신의 영달을 꾀하기 위해 의무를 거부한 이도 엄연히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행태는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반복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조국은 지키는 자에 의해서만 수호된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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