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 달에 기어간 흔적이 있다
달에 기어간 흔적이 있다.
달에 기어간 흔적이 있다. 펄럭거리는 잎맥 자국이 있다 대야의 물로 성(性)을 씻은 여인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본다.
거울 속에서 민달팽이가 간다.
녹색 셀로판지로 된 여인숙 출입문 밖에 바다가 와 있다. 여인이 사라지고 대야의 물이 환하다 쭈그리고 앉아 바라본다. 깊어가는 거울 속
- 박형준(1966~ )
달에서 내려온 한 여자가 다시 달에 가려고 한다. 달에서 내려온 여자는 자신을 비춰주는 데를 골라 다니며 왔고 다시 그러한 방식으로 달에 가야 한다. 그녀는 대야의 물을 들어다보고 대야의 물로 자신이 여자임을 달에서 온 빛임을 확인한다. 대야의 물은 그녀의 ‘디딤돌’ 인 셈이다. 그녀는 순간 민달팽이가 되어 기어간다. 민달팽이는 알다시피 벌거숭이이고 살(肉)보다는 물에 가까운 생물체다. 거울에 제 온몸을 짓뭉개며 침 자국을 남기며 기어가는 벌거숭이 여자. 징그럽고 가련한 여자. 그녀는 때로 가짜 거울인 녹색 셀로판지를 건너야 한다. 그곳은 늪이며 허공인 여인숙이다. 그녀의 이승은 여인숙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인 바다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곳을 건너기는 힘에 겨운 일이어서 끝내 침몰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침몰은 사라짐이 아니다. 오르가슴이 그렇듯 재생하는 침몰이니 그믐과 같다. 그렇게 재생과 침몰을 궁리하며 한 소년이 앉아 있다. 소년의 손이, 살이 다 젖었으리라. (조선일보 10월 8일)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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