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조] 외딴집
외딴집
누가 살아서 지붕에 고추를 말리시나 큰길이 뚫리기 전, 아는 이도 없었을 흉년 든 어느 해인가 그냥 밭에 눌러앉았을
요즘 들어 울담에는 애호박도 보인다 털다 만 깻단들이 마당에 수북한 날 “계세요?” “누구 계세요?” 인사라도 하고 싶다
정작 반세기 동안 이웃 없이 살아서 말문이 닫혔다면 이 가을엔 여시라! 불임의 먹감나무가 해거리 끝에 땡감 달듯이
―홍성운(1959~ )
시월 하늘이 푸르기 짝이 없다. 거기에 빨간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있어 한국의 가을은 더 눈부시다. 빨간 고추를 말리는 지붕이며 마당에서 착실히 익어가는 우리의 가을. 그렇게 순도 높은 햇볕과 바람과 정성으로 말리는 태양초는 말 그대로 한국의 진짜 맛이다. 도회지 아들딸들에게 보내주는 맵싸한 깊이를 지닌 고향의 참맛이다.
그러니 외딴집이라도 빨갛게 익은 고추를 말리는 지붕은 따뜻하고 아름답다. 쓸쓸하고 막막한 중에도 누군가에게는 잘 말린 고추를 보내주겠거니 하면, 보는 사람도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그러는 동안은 외딴집 지붕도 외롭지 않으리라. 그래서 그냥 인사라도 하고 싶은 날이면, '털다 만 깻단'에서도 고소한 향이 한층 짙어져 가을 마당에 널리널리 퍼지리라. 정수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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