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 오미자술
오미자술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황동규 (1938~ ) ▲유재일
술 익는 시간이다. 지금, 뭇 열매로 담근 '올해의 술'들이 선반에서, 컴컴한 지하에서, 책꽂이 모퉁이에서 숨죽여 익고 있을 것이다. 숨죽일수록, 그러나 언젠가 누군가의 가슴으로 스며들어 폭발할 웃음 '분자'는 짙어지리라. 지난 한 해 살이의 보람이 고스란히 열매의 빛깔과 향기로 스몄을 터이니 그것을 녹여 몸에 들이는 일은 생각해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풍류인가.
그중 아름다운 술이 오미자다. 이름도 즐거워라. 오미자! 크게 폼 잡을 것 없이 허드레 병에 허드레 술 사다가 담그면 '차츰차츰' 제 향과 빛깔을 내어놓는다. 그 영롱한 술 빛을 루비라는 보석에 비할까. 유혹이 아름답다면 슬그머니 넘어가 주는 것이 여유요, 멋인 줄 안다. 시쳇말로 융합의 아름다움? 생활에서의 술의 미덕이다.
폭설의 어느 날 투명 잔에 부어 흰 세상을 배경으로 그 환한 액체로 입술을 적시리. 용서하기 어려운 일, 해결되리.
장석남 |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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