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인연/옛 그림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展 (스크랩)

무너미 2014. 1. 19. 23:28

 


▲ 박수근, 앉아있는 여인, 1963, Oil on Canvas, 65x53cm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展]

전시일정 ▶ 2014. 01. 17 ~ 2014. 03. 16
가나인사아트센터(GANAINSA ART CENTER)


[박수근 / 그의 예술세계를 되돌아본다]

유홍준(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전 문화재청장)

 
1914년, 그가 태어난 때는 우리 근대미술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바로 전 해(1913년)에는 춘곡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서양화에 대한 인식은 전무한 상태여서

그가 미술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을 신문은 대서특필하고

서양화라는 유화란 우리의 전통회화와는 재료와 기법이 모두 달라서

‘기름기 있는 되다란 물감을 천에다 바르는’ 그림이라는 해설이 실릴 정도였다.

그런 시절에 태어난 박수근이 성장하여 결국 그가 이룩한 예술적 업적이

우리 근대미술의 마지막 성과로 수렴되었으니 그 상징하는 바가 자못 크다.

역사적인 거리를 갖는 작가상이란 왕왕 그의 다양한 인간적 예술적 실체들이,

마치 박수근의 작품에 나오는 나목처럼 곁가지가 모두 쳐지고

오롯하게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곤 하는데

그것은 한 인간이 죽은 다음 역사적 인물로 영원히 남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에게 남겨진 박수근이라는 인간상은 ‘서민의 화가’이다.

박수근은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전형적인 서민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작가상 역시 ‘서민의 화가’이다.

고인에게 결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창신동 집 마루에서 아내와 막내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

가장 박수근의 인간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소매 내의에 양말을 벗고 손가락 깍지를 끼어

양 무릎을 껴안은 채 이쪽을 바라보는 천연스런 자세와 어진 눈빛이

이 사진 뒷배경이 된 그의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과 흔연히 어울린다.

게다가 새로 산 흰 고무신이 마루 위에 잘 모셔져있어

이 가난한 화가의 맑은 마음씨를 보는 듯하다.

창신동생가.JPG



▲ 박수근, 노상 Street Scene, 1957, Oil on Canvas, 31.5x41cm



▲ 박수근, 빨래터 Washerwomen by the Stream, 1959, Oil on Canvas, 50.5x111.5cm



▲ 박수근, 시장 사람들 People at the Marketplace, 1950s, Oil on Canvas, 77.5x51.5cm



▲ 박수근, 우물가(집) A Cottage near the Well, 1954, Oil on Hardboard, 19x24.5cm



▲ 박수근, 아기업은 소녀와 아이들 A Girl Tending to a Infant and Children, 1950s
Oil on Canvas, 45.8x37.5cm


박수근은 서민의 화가라 일컬어지듯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서민의 일상 모습이다.

골목길 풍경, 일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할아버지와 손자,

아기를 업은 소녀, 할머니, 행인, 공기놀이하는 소녀들…

박수근이 남자보다 여인과 소녀상을 더 많이 그렸다는 사실은

서민의 희망을 오히려 거기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연약한 여인의 몸이지만 어진 마음으로 주어진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따스한 온정이 느껴지는 그분들이 박수근 그림의 주인공으로 된 것이다.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벌거벗은 나무의 의미 또한 그의 인물과 비슷한 것이다.

박수근은 좀처럼 꽃을 그리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남긴 <모란꽃>과 <목련>을 보면

둘 다 화려함이 아니라 애잔한 흰 꽃들이다.

꽃뿐만 아니라 그는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잎새의 표현에도 아주 인색하여

<노목과 어린나무>에서나 겨우 새순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

박수근의 그림에서는 나무든 인물이든 현재의 모습은

고단한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조용히 삶의 새 봄을 기다리는 그런 희망이 애잔하게 그려 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갔던 서민들의 참 모습이기도 하였다.

박수근 예술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바위 질감을 느끼게 하는 두터운 마티엘 효과에 있고,

그의 그림이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 화강암의 질감을 느끼게 하는 향토적이면서 거친 듯 소박한 느낌이

그가 취한 소재들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면 박수근은 왜 이처럼 바위 질감을 느끼게 하는

두터운 마티엘을 추구했을까?

박수근은 정말로 가난한 화가였다.

당시는 그림물감이 비싸고 귀했다.

그럼에도 그 귀한 물감을 두껍게 발라 이런 형식을 추구할 때는

분명한 이유, 즉 조형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형식 자체의 논리가 그렇게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런 형식을 요구한 것일 수도 있다.

형식주의자가 아니었던 박수근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수근은 서민의 삶을 그렸지만 그것을 풍속도로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린 서민상은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진국이다.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고 실제로 작품세계 또한 그러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이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 그림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다.

농악을 그린 작품조차도 정지감이 강하다.

그런데 박수근 그림의 화풍상 변화를 보면

마티엘은 거칠고 굵은 데에서

점점 부드럽고 자잘한 질감으로 옮겨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속의 대상 표현도 처음에는 굵은 선에서 나중에는 가는 선으로,

곡선과 묘사적 성격의 선에서 직선과 간결한 요약의 선으로,

은은한 배경에서 완벽한 평면으로 전환된 것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같은 <아기 보는 소녀>라도 1953년 작품은

굵은 윤곽선과 거친 마티엘에 움직임이 감지되는 서정적 정경이 동반되지만,

1963년 작품에서는 완벽한 정면성의 원리와 가는 직선으로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만년의 경향이야말로 박수근 예술의 본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중세 이콘(icon, 성화)의 분위기는

이런 연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어딘지 종교화적 거룩함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1961년 작,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를 그린 <모자>라는 작품을 보면

기독교의 <성모자상(聖母子像)>이라는 도상을 연상케 되며,

그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도상으로 번안한 듯한 인상까지 받고 있다.

이 점은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박수근 그림에 나온 인물들은 만년으로 갈수록

표현의 사실성에서 의미의 상징성으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박수근의 만년작에 이르면 영원불멸의 정지성 내지는 고착성이 두드러진다.

과장되게 말하면 화강암에 새겨진 마애불과 같은 느낌이다.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마애불과 같은 거룩하고 의연한 인간.

다만 바위가 아닌 캔버스이고, 부처가 아닌 서민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나는 박수근 예술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 박수근, 아기보는 소녀 A Girl Tending to an Infant, 1953, Oil on Canvas, 27.5x13cm



▲ 박수근, 노인과 소녀 The Old and the Young, 1959, Oil on Canvas, 130x80cm



▲ 박수근, 여인과 소녀들 A Woman and Girls, 1964, Oil on Hardboard, 25.8x32cm



▲ 박수근, 귀로 The Way Home, 1964, Oil on Hardboard, 26.8X34.3cm



▲ 박수근, 고목과 행인, An Old Tree and Women, 1960s, Oil on Canvas, 53x40.5cm



▲ 박수근, 귀로 The Way Home, 1964, Oil on Hardboard, 16.4x34.6cm


그러면 박수근이 이처럼 그 질감을 바위처럼 나타내고

마애불처럼 인물을 화면에 고착시킨다는 조형적 발상을 어디서 얻었을까?

박수근 작품 중에 돌멩이에 대고 연필로 문지른

프로타주로 기법으로 된 <소>라는 작품이 있고,

그의 삽화 중에는 산동네 화강암 절벽을 프로타주 기법으로 나타낸 것을 보면

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박수근의 벗인 황유엽, 장이석 화백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경주를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경주 남산에서 마애불과 석탑들에 큰 감동을 받아 탁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수근은 신라 토기나 석물조각들을 수집하여

작업실에 두고 만지고 살펴보면서 작품기법에 대해 연구했다.



▲ 박수근, 1960년대, Watercolor and Pencil on Paper, 31.5x25.5cm



▲ 박수근, 청색 고무신, 1962, Watercolor and Pencil on Paper, 20.5x30.5cm



▲ 04 가나아트, 박수근, 과일쟁반, 1962, Watercolor and pencil on paper, 25x31cm

 

박수근의 예술세계를 말할 때면

그의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유화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나,

그의 수채화는 대단히 아름답고 조형적 밀도,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박수근 수채화 중 <고무신> <책가방> <과일쟁반> <복숭아> 등은

가히 명화라 할 아름답고 사랑스런 작품이다.

그 해맑고 따뜻한 색감에는 박수근과 그의 시대적 순정이 남김없이 어려 있다.

그것은 그가 유화로는 나타낼 수 없던 서정의 구가였다.
소재의 선택도 그렇다.

<고무신>은 분명 아내가 새로 사온 꽃신일 것이고

<책가방>은 여학교 다니는 딸의 가방일 것이다.

일종의 정물화인데 박수근이 다름 아닌

아내의 고무신과 딸아이의 책가방을 그렸다는 것은

유화에서 장터의 아내, 동생을 업고 있는 언니를 그린 것과 똑같은 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밝은 채색이 가능한 수채화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수근의 수채화는 그의 예술세계를 논할 때

유화와 동일한 지평에서 평가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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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50년, 60년을 보내면서 여러 분야 전공자들이 어울러

각 분야의 성과를 교체 검토하는 학제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런 학술행사가 많아지면서 20세기 후반

한국문화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를 보내면서 그 시대 인간,

특히 서민 또는 민중이 갖고 있는 삶 의 정서를

박수근 화백만큼 절절한 감정으로 표현한

학자가 있습니까, 정치가가 있습니까, 사상가가 있습니까, 소설가가 있습니까?


박수근은 그 시대 서민의 실상을 체득하면서 그 아픔에 동참했고

사랑으로 삭히면서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혹자는 박수근의 작품 속에 나오는 서민은 정치의식의 결여로

각성되지 못한 민중 이라면서 그의 리얼리즘의 한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박수근의 한계가 아니라 그 시대의 한계 였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외면한 것을 화가로서 포착해낸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박수근은 그림을 통해

위대한 사상가 못지않은 인간정신의 고귀성을 표현했다.

뛰어난 지성이나 예리한 감성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면밀히 관찰하여

부동(不動)의 형태로 고정시킴으로써 성공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아들에게 가르쳤다는

“더욱더 작아지게 하소서”라는 겸손의 미덕이 새삼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박수근이라는 화가의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