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 빗물 사발
빗물 사발
아무런 기척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누가 거기 두고 갔는지
이 빠진 사발은
똑, 똑, 똑, 지붕의 빗방울을 받아
흙먼지 가득한 입을 열었다
그릇의 중심에서
출렁이며 혀가 돋아나
잃었던 소리를 되살려 놓는 것
둥글게 둥글게 물의 파장이
연이어 물레를 돌리자
금 간 연꽃도
그릇을 다시 향기로 채웠다
사람을 보내놓고 허기졌던 빈집은
삭은 입술을 사발에 대고
모처럼 배를 채웠다
-길상호(1973~ )
▲일러스트 : 김성규
조용조용하게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사람이 떠난 빈집 마당 한구석에는 사기로 만든 그릇이 하나 놓여 있다. 사발은 위가 넓고 아래는 좁으며 굽이 있고 줄금이 나 있다. 그 그릇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빗방울이 똑, 똑, 똑, 떨어지자 사발이 둥근 입을 벌려 그것을 받는다. 빗방울을 받아 다시 소리가 생겨나고 점차 물결이 생겨나고 연꽃 봉오리가 벙글어 향기가 돈다. 심지어 빈집이 그 사발에 입을 대고 괸 봄비를 마셔 곯은 배를 채운다.
빗방울로 인해서 이 폐옥(廢屋)의 사물들은 깨어나고 그 혈색에 한결 생기가 돈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목말라 있던 빈집이 사발의 빗물을 스스로 들이켠다는 상상력은 얼마나 역동적인가. 시인 엘리엇(T S Eliot)이 쓴 시의 구절처럼 봄비는 생명이 잠들어 있는, 메마른 뿌리를 흔들어 깨운다.
문태준 시인
[출처] 조선닷컴
'詩, 詩調. 童詩, 漢詩 > 가슴으로 읽는 시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와 그림자 (0) | 2015.05.02 |
---|---|
하루의 일을 끝내고 (0) | 2015.04.25 |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0) | 2015.04.11 |
고월(古月) (0) | 2015.04.04 |
귀를 씻다 ―山詩 2 (0) | 2015.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