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조] 외등
▲일러스트 : ? | 외등
굴뚝이 제 속을 까맣게 태우면서 누군가의 따스한 저녁을 마련할 때 길 건너 어둠을 받는 밀보릿빛 우산 하나
먹물에 목이 잠겨 야위는 강을 지나 내 꿈의 어지러운 십자로를 한참 돌아 사랑이 절면서 오는 굽은 길목 어귀에
―문희숙(1960~ )
불이 조금씩 당겨지는 나날. 밤이 길어지며 불빛이 한층 다사해진다. 그럴 즈음 길목마다 밤을 새우며 서 있는 외등은 기다림의 |
은유 같다. 목을 길게 늘인 등일수록 골목에 나와 서성거리던 어머니의 눈빛을 담고 있다.
'제 속을 까맣게 태우면서/누군가의 따스한 저녁을 마련'하는 굴뚝도 그러하다. 웅숭깊은 속내가 똑 어머니의 헌신을 닮았다. 그 연기들이 다 식구의 저녁을 마련하며 속 태우는 일이었으니 무심코 지나쳐온 굴뚝의 세월이 새삼 다시 뵌다. 외등 아래 그림 같은 '밀보릿빛 우산'은 그래서 나날의 안온한 귀가를 했겠다. 그런 가운데도 강물은 늘 떠나듯, 꿈은 여전히 '어지러운 십자로'다. 하지만 좀 더 설렁거려도 괜찮을 가을이다.
'굽은 길목 어귀' 어딘가에 한참씩 목을 얹어본 기억. 가을 저녁이라 더 그랬을까. 절면서라도 그대 오기만 한다면 외등으로 오래 서 있어도 좋으리.
정수자 시조시인
[출처]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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