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진경(珍景)
진경(珍景)
북한산 백화사 굽잇길
오랜 노역으로 활처럼 휜 등 명아주 지팡이에 떠받치고 무쇠 걸음 중인 노파 뒤를 발목 잘린 유기견이 묵묵히 따르고 있습니다
가쁜 생의 고비 혼자 건너게 할 수 없다며 눈에 밟힌다며
절룩절룩 쩔뚝쩔뚝
―손세실리아(1963~ )('꿈결에 시를 베다', 실천문학사, 2014) 서울 구파발역에서 버스를 타고 백화사 정류장에 내리면 거기서부터가 백화사 입구이자 북한산 입구다. 조금 걸어 들어가면 여기소경로당이 있다.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사내를 만나러 온 여인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던졌다는, '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이라는 뜻의 여기소가 있던 자리다. 더 올라가면 계곡 길목에 민가처럼 보이는 백화사가 있다. 늙은 궁녀와 내시들이 의탁했던 곳이란다.
마디지고 옹이진 명아주 지팡이에 굽은 등을 의탁해 무쇠 걸음 중인 저 노파는 여기소경로당 '당원'이신 모양이다. 발목 잘린 유기견이 노파를 뒤따른다. 가쁜 생의 고비인 듯 굽잇길을 지나 하얗게 꽃핀 '백화(白華)'사 가는 길이었을까? 희디흰 사멸을 향해 절룩절룩 앞서가면 절뚝절뚝 따라가는 동행의 화답이 묵묵하다. '진경(珍景)'이란 보기 드문 풍경을 일컫는다. 속세의 진경(塵境) 속 늙고 다친 것들이 서로 의지하며 나아가는 진경(進境)의 이 실제 진경(眞景)이 참된 진경(眞境) 자체다.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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