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가을 맨드라미
가을 맨드라미
1
근본 한미한 선비는 다만 적막할 따름이다
이따금 무료를 간 보느니
2
긴 여름내 드높이 간두에 돋우었던 생각의 화염을 속으로 속으로만 낮춰 끄고 있노니
유배 나가듯 병마에 구참(久參)들 하나둘 자리 뜨는 텅 빈 가을날
―홍신선(1944~ ) ('우연을 점 찍다', 문학과지성사, 2009) 어릴 적 우물가에는 맨드라미꽃과 칸나꽃이 여름 해를 삼킨 듯 빨갛게 피어 있었다. 닭볏을 닮은 참맨드라미꽃은 추석 즈음까지도 피었는데, 꽃을 따 절구에 찧어 짜낸 꽃물로 반죽을 해 빚으면 곱디고운 분홍 송편이 되었다. 어린 나는 그게 그리 신기했고 그 분홍이 그리도 어여뻤더랬다. 가을 맨드라미는 내게 다디단 분홍 떡 빛이고 살빛이고, 모든 분홍의 근원이다.
그러나 가을 선비의 적막과 무료를 좇는 시인에게 가을 맨드라미는 병든 구참(수도 생활을 오래 한 스님)들이 여름내 피워 올렸던 '생각의 화염'이다. 그 꽃 진 자리, 이제는 '다만 늙고 병든' 고참의 친구들 하나 둘 유배가듯 시름시름 자리 뜨는 가을의 적막함을 일깨운다. 여름내 한 생각 그 백척의 '간두(竿頭)'까지 돋우었으니, 하나 둘 떠난 자리 더더더 시리겠다. 소슬하다는 말, 이럴 때 제격이겠다.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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