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1926~1956)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예옥, 2006) 사라졌지만 잊지 못하는 것, 갔지만 남는 것, 사람이고 사랑이다, 기억이고 세월이다. 전쟁 직후 대폿집에서 첫사랑을 떠올리며 '명동 백작' 박인환이 일필휘지로 쓴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임만석이 노래로 불렀다는 전설적 가을 명품이다. 이 시를 남기고 며칠 지나 숙취의 심장마비로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났다. 시인도, 첫사랑도, 친구도, 전쟁도, 명동 거리도 다 사라졌지만 시와 노래는 '명동 엘레지'로 우리 가슴에 남았다. 꽃 필 때는 피는 꽃처럼 오고 잎 질 때는 지는 잎처럼 가는, '그 눈동자와 입술'은 오래된 미래다. 미래의 옛날이다. 나뭇잎이 떨어져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사라진다 해도 여름이어서 빛났고 가을이어서 서늘했다. 이 서늘한 가슴에 살아남는, 사랑보다 세월, 세월보다 기억!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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