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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의 상징 삼전도 비

무너미 2009. 5. 6. 23:50

 

 굴욕의 상징 삼전도 비

 아름다운 조각으로 치장 되어 있는 비의 덮게

 한자로 기록 되여 있는 비의 뒷면 (역광이라 보이지 않네요)

 삼전비의 옆에 있는 비의 몸통이 없는 비석 받침

 옆에서 본 비

 삼전도의 굴욕 삼전도비의 앞쪽에 있는 부조 그림이다.

삼전비와 그림부조 전 장면

 비의 옆에서 본 덮게

 

종 목 : 사적 제101호

명 칭 : 삼전도비(三田渡碑)

분 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면적 2,850㎡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송파구

 

서울노인 복지센터 문화애호 봉사회 회원님 13명이 송파구 석촌역 6번 출구를 나서서 물어물어 찾고 보니 석촌 유치원 앞 공원에 자리잡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이른 아침이라서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기도 했지만 비석의 존재나 위치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고 이웃집 아주머니 한 분이 병아리 4마리를 풀어서 놀이 하고 있었다.

 

문헌에 의하면 청 태종은 자신이 앉아 있는 단에서 1백보 앞까지 자갈을 깐 후

인조로 하여금 죄인이 입는 베옷을 입고 엎드려 기어오도록 한 후,

단에 이르러서는 “대죄를 용서하여주소서”라고 빌면서 ‘삼배구고두’를 행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에 인조의 무릎이 까지고 이마에 선혈이 낭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머리로 땅바닥을 받을 때마다 배석한 청나라 관리들이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작다며 더 세게 박으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비의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을 왜 침공했는지의 이유와 조선이 항복한 사실,

청나라가 조선의 항복 후 청태종의 배려로 조선에 더 이상의 피해를 주지 않고

곧바로 돌아갔다는 등의 내용이 쓰여 있다.(가슴 아프다.)

 

이 비석은 북방의 오랑캐들이 왕을 '칸(한(汗))'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한의 비(汗)의 비'라고도 부르고 비문에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 적혀있다.

우리나라로서는 굴욕적인 비석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굴욕적인 자료가 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일까?

 

다음의 두 가지 이유가 전해진다.

1. 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비석이다.

삼전도비는 비의 앞면 오른쪽은 만주문자로 20줄, 왼쪽은 몽고문자로 20줄 기록되어 있고,

뒷면은 모두 한자로 되어있다.

3개국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 유일한 비이다.

동북아시아 3개국의 문자를 연구하는 데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자료를 검색 하던 중 아래 블로그에서

삼전도비의 탁본 자료와 비문(대청황제공덕비)의 전문과 한글 번역판이 잘 정리 되여 있었다. 읽는 동안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낄 정도여서 서울노인 복지센터 문화애호 봉사 회원님들도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사이트에서 퍼가지 못하게 막아 놓아서 주소를 복사했으니

아래 주소를 클릭하고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sabul358/1832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