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 기행(충북 괴산 답사기행 김경식 시인과 함께)
서울노인복지센터 회원님들 김경식 시인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형구돌 병인박해(1866년)때 순교자들을 소리없이 죽이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만들도록 명을 내림으로써 만든 것이 '형구돌'이다. 밧줄을 건 교우의 목이 앞구멍에 놓이면 반대편 구멍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이던 잔혹한 형구이다. 연풍성지에서 발굴된 형구돌은 모두 3개로 직경 1미터, 둘레는 4~4.5 미터의 크기이며 바위돌 가운데에는 직경 25~30 센티미터, 뒷 직경은 7 센티미터 원추형 구멍이 뚫려 있다.
성 황석두 루가(1813-1866, 54세)
성 황석두 루가는 일명 재건이며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3대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해서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도중 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 뒤 부친의 반대를 무릎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그의 뛰어난 교리지식과 덕행으로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를 거쳐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고, 또 페레올 주교에게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으로 생활하면서 오로지 교회일에만 전념하였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며 교회서적 출판에 관계하던 중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3월 30일 충남보령의 갈매못에서 성직자들과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 형을 받고 순교하여, 천상 교회의 가족이 되었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공소로 옛날 향청 건물을 사 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매입 후 논과 집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3개나 발견됐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가시화 됐다. 1979년에는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1982년 연풍성지로 이장했다.
서울노인복지센터 회원님들과 김경식 시인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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