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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2대 - 흥덕왕릉興德王陵

무너미 2011. 4. 7. 04:49

신라 42대 - 흥덕왕릉興德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에 있는 신라 흥덕왕의 능. 사적 제30호.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의 무덤으로 무덤제도가 잘 갖추어진 왕릉이다.

 

 흥덕왕의 본명은 김수종(경휘)이며,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고, 당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하였다.

 

 비교적 커다란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탱석과 면석 위에는 다시 갑석을 올려 마무리 하였다.

 

 무덤의 주위 4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마리씩 배치하였고, 앞쪽의 왼쪽과 오른쪽에 문인석·무인석을 각 1쌍씩 배치하였다. 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귀부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무덤의 위치가 이 무덤과 대체로 일치하며, 왕릉 주위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비석조각이 발견되어 이 무덤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있다. 전체적인 배치와 장식물의 양식으로 볼 때 성덕왕릉과 괘릉의 형식을 많이 본따고 있다.

 

 12지신상.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다소곳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있는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의 큰 얼굴에는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콧날은 우뚝 선 매부리코를 가졌으며 머리에는 아랍식 둥근 터번을 쓰고 있다. 그리고 250cm 정도의 큰 키로 만든 것을 보면 키가 큰 아랍인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그만 상단을 꾸릴려고 해도 무인(武人)이 필요한데 대규모 무역을 할 때는 해적을 물리칠 무인이 필수적이다. 무인석은 손에 무기를 든 모습을 하고 있다.

 

귀부(비석받침)[龜趺](거북 모양의 비석받침.)

 

거북 모양의 잔등에 장방형의 받침(碑座)을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 일은 중국 당(唐)나라 때부터 성행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비석을 세울 때에는 일반적으로 땅에 묻거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통일신라 이후 당의 영향을 받아 귀부를 비좌로 삼게 되었고, 그뒤 조선시대까지 석비(石碑)의 전형적인 형식이 되었다. <다음 백과>

 

거대한 묘비를 세웠던 귀부 만이 남아 있다.

발굴 된 비신 조각에 의해 흥덕왕릉으로 판명 되었다.

 

망주석[화표주]

무덤 앞에 세우는 1쌍의 돌기둥.

  

신라 42대 - 흥덕왕릉興德王陵  사적 30호 표지석

흥덕왕릉의 소나무들

누은 소나무는 누운 대로 멋있게 살아가고, 굽은 소나무는 굽은 그대로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이 인생살이만큼 다양해......

 

 

 

흥덕왕릉을 답사하고 내려오다가 마을회관과 회관 앞의 보리밭의 녹색이 봄을 재촉하고 구제역을 피해간 축사들이 정겹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