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長安門). "나라가 길이 편안하라"는 의미입니다.
숭례문과 비슷한 격식, 더 큰 복층구조의 다포식 누각이 올려져 있습니다. 지붕마루는 양생을 했고 잡상들을 올려 놓았네요.
왕이 이용하는 시설이다보니 조선의 관청, 궁궐건축으로서는 최고의 품격을 갖추었습니다.
옹성이 둘러져 있는데, 그 안쪽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조금 어둡습니다.
정조대왕의 혼이 서려 있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설계한 조선 최고, 최강의 도시 방어요새인 수원 화성은 기본적으로 조총과 화포를 사용하는 전투를 상정한 설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성벽에는 병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여장을 별도로 견고히 쌓고 여장에는 일정 간격으로 총안을 만들어 포수, 궁수와 더불어 화포를 배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벽에는 주변을 감시하고 제압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어구조물이 같이 세워지는데, 성벽에서 조금 튀어나온 형태로 만들어진 가장 간단한 방어시설을 치(峙)라 합니다. 치는 전면 뿐만 아니라 좌우를 함께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치와 치 사이의 간격은 방어무기의 사정거리가 어느정도 오버래핑되도록 하는 선에서 결정됩니다. 요즘에도 방어 목적으로 기관총을 운용할 때, 전선의 중앙부가 아닌 양쪽에서 중앙을 향해 사격하도록 배치하는데요, 연속 발사로 날아가는 총알들이 돌진해오는 적의 대열을 대각선으로 쓸어버리면서 동시에 여러 표적을 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대의 기관총을 좌-우선에 배치해 집중사격하면 중앙의 직접사격과 함께 무시무시한 화망을 구성할 수 있지요. 치와 같은 구조물을 성문 양쪽에 설치해 놓은 것을 적대(敵臺)라 합니다. 성문은 기본적으로 성벽의 출입구이기 때문에 보다 엄중한 방어가 필요한데요, 적대는 옹성과 더불어 아주 중요한 성문 방어 시설입니다.
![]() 서북포루(西北包樓)의 누각 처마. 균일하게 총안이 뚫린 여장의 구조도 잘 보입니다.
기와의 막새에는 봉황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요, 조선 국왕의 상징이 바로 봉황입니다.
봉황은 오늘날 한국 대통령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치의 화력을 더욱 강화한 것이 바로 포루(包樓)입니다. 포루는 치와 달리 화포를 더욱 효율적으로 배치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기 때문에 규모도 더 크고, 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력을 성 아래의 적에게 퍼부을 수 있습니다. 포루에는 지붕이 있는 누각이 설치되어 있고, 화포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필요한 탄약과 화약 등의 보급 시설은 물론 포수들의 대기, 휴식 장소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화포 역시 다양한 사거리별로 더욱 밀집배치되어 있습니다.
![]() 차가운 겨울 바람에 마주 선 화성 서북각루.
억새밭 너머 성벽에는 다양한 시설들이 되어 있습니다.
각루(閣樓)는 성의 네 모서리에 세워지는 감시소로, 성문 다음으로 중요한 관측장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수원 화성에도 동서남북의 4대문 외에 동북-서북-남동-남서 네 개의 각루가 존재했습니다. 포루와 유사하지만 치를 한층 여유있게 만들고 시야가 좋은 누각을 설치해 화력투사보다는 관측과 감시에 더 큰 목적을 둔 시설로 보면 되겠습니다. 위치 역시 모서리의 중요한 포인트에 설치합니다.
![]() 화서문의 옹성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북공심돈.
공심돈을 영어로 번역하면 "Watchtower" 라고 합니다만, 본디 의미에는 조금 약하네요.
또한 화성에는 조선 최초로 포루와 각루의 기능을 결합한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는데요, 바로 공심돈(空心墩)입니다. 일반적인 석축-전축(벽돌)식 구조가 결합된 서북공심돈과 더불어 완전 전축식으로 쌓여진 동북공심돈 2개 시설이 성벽에 아직 남아 위용을 자랑합니다. 공심돈은 일반적인 치보다 우뚝하게 높은 형태로 되어 있고, 상부에는 누각이 설치되어 지붕 있는 감시소 역할을 합니다. 또한 높이 솟은 구조물 측면으로는 많은 수의 총안이 배치되어 병사들은 두터운 돌방벽 안에서 주변을 향해 조총과 화포를 더욱 밀집된 화력으로 발사할 수 있습니다. 완공된 화성을 처음으로 순시하던 정조 임금님께서는 뒤따르던 신하들에게 서북공심돈을 가리키며, "조선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공심돈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자랑했다는 일화도 남아있네요. 노론당 신하들은 마음이 좀 언짢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외에도 화성은 종합 군사지휘소인 장대가 2군데 설치되어 있고, 쇠뇌를 발사할 수 있는 노대(弩臺)등 다양한 방어시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왕의 시설이라는 격에 맞게 모든 장식의 품격이 맞추어져 있고, 구석구석 벽돌과 기와 등으로 멋을 냈는데요, 꼼꼼히 돌아보자면 하루가 다 모자랄 지경입니다.
![]()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일명 '소라각'이라고 불리며 내부에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는 통로가 있습니다.
화성을 짓기 이전에 우리 나라는 건축에 벽돌을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 않았는데요,
이 시설은 화성 건축의 장인들이 벽돌 건축에 가진 자신감을 보여주는 대표적 건물이라 합니다.
![]() 동장대(東將臺). 장대는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입니다.
진짜 관측소처럼 보이는 또 다른 장대인 팔달산 위 화성장대(서장대)와 달리 큰 마당이 있고 공간이 넓은 것이 특징입니다.
직선으로 단정하게 만들어진 구조, 붉은 기둥, 화려하지만 절도 있는 모로단청 등 조선 관청 건축의 교과서와도 같습니다.
정조 임금님은 이곳에서 군사들을 훈련시키거나 백성들을 불러 호궤(犒饋)했습니다.
![]() 굽이굽이 이어지는 화성 성벽과 우뚝 선 동북포루(각건대)의 모습입니다.
포루가 성벽에 어떻게 설치되고, 얼마만큼 주변을 노려볼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지요.
멀리 보이는 기와지붕은 동장대, 그리고 뭉툭한 탑 같은 것은 동북공심돈입니다.
화성은 비교적 근대에 만들어진 읍성으로, 조선의 경제구조가 농업에서 상업으로 바뀌어 도시건설 계획의 일부로 시대 요구가 반영되어 있는 미래적 시설입니다. 사실 예전에는 주요 방어작전을 부근의 산성에서 수행하는 입보농성 작전을 택했습니다. 한성(서울)의 경우 읍성은 도성 성곽이지만 방어거점인 산성으로 남한산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로 경제의 주류가 상업으로 바뀌면서 상업지구가 형성된 읍성을 반드시 지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입니다. 또한 큰 도시의 성으로는 처음으로 남북으로 대로를 낸 성인데요, 상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지역간 소통이 중요함이 반영되어진 것입니다. (예전에는 유교-풍수사상의 영향으로 배후에 큰 산을 두었기 때문에 주로 동서로 대로를 냈지요.) 아울러 조선 최초의 신도시 건설 계획으로 만들어진 민간인 거주지역과 상업지역, 그리고 행궁을 비롯한 내부 시설, 그리고 방어시설들이 철저한 계획하에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전제군주적 방식을 쓰지 않고 백성들의 이주보상비를 일일이 지급하고, 축성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도 정확히 계산된 임금을 지급하는 등 화성은 그 축성 과정 뒤편에 정말로 많은 변화의 바람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계획과 과정들은 현재 대한민국의 신도시 건설계획에도 많은 부분 참고되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화성은 조선의 모든 성벽 건축기술이 총동원된 종합 박물관과 같은 장소로 역대 이래 가장 강력한 전투 요새로 건축되어 왕의 치세, 그리고 위엄을 만천하에 자랑하던 상징적 시설이기도 했습니다.
![]() 벽돌 구조로 성문 앞을 둥글게 둘러친 옹성이 설치된 장안문의 모습.
길을 건너는 횡단보도가 바로 문 앞으로 이어지고, 늘 열린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화성은 이렇듯 우리 바로 곁에 있는 문화재입니다.
화성은 질곡의 한국 근대사를 겪으며 많은 부분 왜곡 또는 파손되었으나, 선조들의 꼼꼼한 축성 기록이 담긴 '화성성역의궤'가 남아 있어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복원될 수 있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도 까다로운 심사 끝에 그 점을 인정, 많은 부분이 복원문화재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세계유산(World Heritage)으로 지정해 주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화성을 돌아 보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문화재가 있다는 것도 뿌듯하지만, 유리관 속에 담긴 박제처럼 보관되지 않고 실제로 찾아가 성벽을 쓰다듬고 그 위를 천천히 걸어 볼 수 있는 현실 속의 문화재로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화성은 아직도 인식 없는 몇몇 이들에게 가끔씩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우리의 문화재를 지킬 사람은 오직 우리뿐이라는 것, 우리는 숭례문을 보아서라도 그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문화재는 우리의 옛 어른이자 미래의 아이들과도 같으니까요.
오늘은 한국의 또 다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지정 기념식이 있는 날입니다. 장대비가 연일 퍼붓는 장마철입니다만, 내일 마침 비가 오지 않네요. 저는 내일 현장 취재를 나갑니다만, 비가 오지 않는다니 너무나 행복합니다. 참으로 역대 조종조가 도우시는 일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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