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 봄날 ―도배일기 18
봄날 - 도배일기 18
양지쪽엔 제법 새순을 틔웠다. 봄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른 봄날 모양낼 것 없고 생긴 대로 깨끗하게만 해 놓으면 되는 월세방 일은 쉽게 끝났다. 연장을 챙겨 나오다보니 주인이 대문에 종이를 붙인다. 언뜻 보면 반야삼경 한 구절 같은 ‘삭을새놈 보증오십 월 십오만· 지름보일라’ 보증금 다 까먹고 안 나가는 통에 내 보내는데 애먹었다며 투덜거려도 유리테이프로 꼭꼭 눌러 붙이는 솜씨가 눙숙하다. 누군가 인생의 한겨울을 삭히고 떠나며 남긴 게송치곤 남루하다.
- 강병길(196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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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겨울 난 사람이 있었구나. 그 방바닥 따뜻했을까? 그가 바라보던 벽, 얼룩이 심 했겠지, 그 얼룩의 내용들을 짐작해 본다. 애잔하고 갑갑하고 분노 또한 먼지처럼 일어나다 가라앉는다. 운명이라 탓했으려나? 도배로 그 얼룩들 삶을 가린다. 그 집 주인은 또 어떤가, 어쩌면 주인집 방의 얼룩이 더 복잡할지 모른다. 모르지 않는 처지에 나가라는 말 꺼내는 심정은 어땠을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삶들이다. 남은자가 대신 읊은 반야심경 닮은 게송, ‘삭을새놈···’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양지쪽의 쑥의 새순처럼 모두 피어나시라 기원해 볼뿐, 이 시인은 문막 어딘가에서 도배를 즐기면 시를 짓는다고 한다. 관념놀이 없이 생화로 싱싱한 시다. (조선일보4월일)
장석남 시인 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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