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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읽는 한시] 호젓한 집(幽居·유거)

무너미 2012. 5. 5. 06:45

 

 

 

                           호젓한 집 (幽居·유거)

 

봄풀이 사립문에 오른 곳                  春草上巖扉(춘초상암비)

숨어 살아 세속의 일 드무네               幽居塵事稀(유거진사희)

꽃이 나직해 향기 베개에 스미고         花低香襲枕(화저향습침)

산이 가까워 비췻빛 옷에 물드네         山近翠生衣(산근취생의)

가는 빗방울 못물에서나 보이고          雨細池中見(우세지중견)

약한 바람 버들 끝에서나 알겠네         風微柳上知(풍미유상지)

천기(天機)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곳    天機無跡處(천기무적처)

담담하여 마음과 어긋나지 않네          淡不與心違(담불여심위)

 

                                         -송익필(宋翼弼·1534~1599)

 

 

자연의 변화가 주는 멋은 번잡한 도회지보다는 호젓한 산속에 숨어 사는 이의 거처에서 더 잘 보인다. 고독과 고요함을 즐긴 유학자 송익필에게는 그 변화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베개에 스미는 향기, 옷에 물드는 푸른빛, 너무 가늘어 연못의 물을 봐야만 떨어지는 줄 아는 빗방울, 버들가지 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람 등은 혹시라도 사람이 알아차릴까 봐 염려하는 듯 소리도 없이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렇게 왔다가 가는 것이 자연의 이법, 즉 천기(天機)다. 호젓한 곳에 머무니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는 듯 담담해진다. 세속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은 가끔 그 호젓함이 부럽다. (조선일보 5월 5일)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