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병 6·25 참전 소년병들은 병역의무가 없는 만 18세 미만의 소년들이었지만 정식으로 군번을 부여받고 군에 편성된 정규군이었다. 학생 신분으로 자진해 참전해 군번을 부여받지 못한 비정규군 학도의용군(학도병)과는 달랐다. 소년병은 낙동강 전선이 무너질 위험에 처했던 1950년 여름부터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생존 소년병 7500명… 상당수는 보상 한 푼못받아 [6·25전쟁62년]18세 미만 2만9603명 [2573명 戰死 공식 확인] 최후의 전선 낙동강 전투 - 아군 3만 명중 소년병이 1만 "총탄에 몸이 뚫려 죽어가는 동지들을 하나둘 보면서 우린 서서히 군인이 됐고 결국 전선을 지켜냈다" 옛된 소년병이 이젠 주름 가득 ... 6.25전쟁에 참전했던 옛된 얼굴의 소년 병 (왼쪽 사진안의 오른쪽)이 백발노인 (오른쪽 사진)이 됐다. 기관총을 잡던 고사리 손에도 이제는 주름이 가득하다. 왼쪽 사진은 소년병으로 전장에서 나라를 지킨 이봉갑씨가 간직해 온 사진으로 부대 소속 사진 기사가 찍었다. 오른쪽 사진은 이씨가 2005년 6월 23일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투 참전용사 명패석 앞에서 전사한 동료 이름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 /이봉갑씨 제공.
올해 79세인 이봉갑씨는 17세이던 1950년 경남 밀양군 삼량진에 살았었다. 여름 어느 날 그는 장터에 갔다가 갑작스러운 비상 종소리를 들었다. "청년들 모두 모여라"는 소리에 산불이 난 줄 알고 달려간 그는 난데없이 부산진초등학교로 실려갔다. 그는 소총 분해·조립 등의 간단한 훈련을 받은 뒤 군번을 받고 바로 낙동강 전투에 투입됐다. 소년병이 된 것이다. 연필을 잡아야 할 손에 자기 키만한 총을 들고 포탄과 총알 사이를 뛰어다녔다.
당시 낙동강전선을 지킨 3만 여명의 군인 중 소년병이 1만 여명이었다. 이씨는 평소 "낙동강과 대한민국은 아이들이 지켰다"고 말해 왔다. 지금은 3년째 반신불수로 요양 중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많은 소년병이 이씨처럼 황혼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영예를 누려본 일이 없다. 국방부는 지난 수십년소년·소녀 현역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만 18세 미만의 소년·소녀 징집을 금지하는 국제법 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6·25 발발 62년이 지난 올해 초에야 소년병 규모를 공식 확인했다. 20일 국방부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7월 27일까지 전쟁에 참전한 소년병 수는 2만9603명이며, 이중 전사자가 2573명이다. 당시 '소녀병'도 467명이었다. 이제 생존한 소년병은 7500명만 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지난 2001년 '참전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6·25 참전유공자 중 만 75세 이상인 사람에게 월 5만원씩을 지급해 왔다. 그나마 소년병들은 이른 나이에 군에 갔기에 수당도 5년 정도 늦게서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액수가 올라 12만원씩을 받는 것이 전부다.
1996년 대구에서 결성된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는 "생존 소년병의 30% 이상이 신청방법 등을 몰라 보상금을 받지 못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 :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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