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 꽃
꽃
한 해 동안 캄캄한 흙 속을 뒤져 찾아낸 걸 한순간 허공에 날려버렸다
해마다 똑같은 패를 쥐고 나와 일 년치 노역을 아낌없이 걸고 던지는 화투(花鬪), 향기로운 꽃놀이 끝에
집에 가는 차비나 해라 국밥이나 먹어라 개펑을 뚝 떼어주는 이 아름다운 도박판의 결정(結晶)
까맣게 굳어버린 갸륵한 농부님네 마음을 다시 흙 속에 묻는다.
-이덕규(1961~ )
시골 뜰에는 나리꽃이 한창이다. 이제 막 패기 시작하는 벼이삭들 또한 어느 꽃보다 아름답다. 논둑 곁을 달리는 시골 버스에서 듣는 소리다. "저 나리꽃이 피면 아이들이 방학을 한 거지? 맞지?" "에누리 없지" 그 노인들의 말과 말 사이에 한여름의 더위가 향기롭다. 몇 월 며칠에 방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리꽃이 피면하는 방학!
아무튼 요즘 아이들은 방학은 하지만 나리꽃이 필 때 방학이 온다는, 시적인 시간의 단위가 있다는 것은 모른다. 그뿐인가. 아이들은 나리꽃을 모른다. 그것을 자세히 보았다간 학급 순위에서 처진다. 나리꽃은 여름 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 있다. 하여 이 여름 숲에, 뜰에 나팔소리처럼 떠 있는 그 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것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나는 가끔 우리나라 법관들이 이 여름 한창인 나리꽃을 알까? 그 섭리를 생각해 보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모든 꽃들이 흙 속 암흑 살림의 근면하고 긴장된 화투(花鬪)놀이라는 통찰이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과연 이승의 제대로 된 꽃들일까? (조선일보 8월 4일)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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