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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읽는 시] 지붕 위의 살림

무너미 2012. 7. 31. 06:18

 

 

[가슴으로 읽는 시] 지붕 위의 살림

 

지붕 위의 살림

 

검은 지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이 필 때

붉은 고무대야에 수돗물을 틀어놓고 찌든 이불을 치댈 때

횐 구름이 지붕을 덮고 나무를 덮고 마을을 덮고 지나갈 때

까칠까칠한 수염의 가장이 숫돌에 칼끝을 문지를 때

지붕으로 뛰어 올라온 닭이 벌어진 꽃의 이름을 캐물을 때

기둥에 매달아놓은 옥수수 종자가 아장아장 아이에게 말을 걸 때

둥근 집의 살림은 댓돌 위의 신발처럼 늘어났다.

 

                                                       - 이기인(1967~   )

 

 

지붕은 세상의 모든 삶의 품목을 품는다. 지붕의 양식은 한 공동체의 마음의 양식이고 계급의 양식이다. 지붕을 만들 줄 알면서 이른바 건축이라는 것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나라가 시작되었을 것이고, 사랑도 비로소 따뜻해졌을 것이다. 지붕 아래 간직한 불, 그것이 우리네 살림살이의 큰 양식이다.

 

지붕의 표정을 살펴본다는 것은 그 살림의 높이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붕에 알 수 없는 꽃이 피었으니 퇴락한 집이다. 붉은 고무 대야에 이불을 담가놓고 치댈 때의 그 성가시고 거북하고 끝내 개운치 않은 힘겨운 빨래 행위, 그것이 이 지붕 아래 살림의 표정이다.

 

가장(家長)은 왜 칼을 갈고 있는 것일까? 먼 데서 손님이 온다는 뜻이리라. 닭은 무엇인가를 예감한 듯 지붕에 뛰어올라가 퇴락의 증표인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을 쪼아대고 있다. 새로운 기운이 감돈다. 지붕도 새롭게 바뀔 것만 같다. (조선일보 7월 31일)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