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조] 국수
국수
1 늙은 창녀와 먹어도 되고 노숙인과 먹어도 되네. 도망중인 조선족과 눈빛 깊은 네팔인(人)과 한 세월 젓가락질하며 울음 감춰 먹어도 되네.
2 출출하신 어머니가 무덤 밖에 나셨을 때 무덤 문 닫히기 전에 아들과 서서 먹는 저승도 장수하시라 말아드린 잔치국수
-유종인(1968~ )
국수를 큰 부조(扶助)로 쳐주던 시절이 있었다. 뉘 집 혼사가 있으면 '국수 1관'을 축의(祝儀)로 건네기가 예사였다. 진짜 잔치국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아 먹던 갓 말아낸 국수의 맛! 심심한 국수 한 그릇만 나눠도 불콰해지던 그땐 국수도 물론 귀히 여겼다. 이즈음 국수의 진화(進化)가 놀랍지만, 그래도 잔치국수만 한 게 있으랴. 쉽게, 편하게, 서서 먹을 수도 있는 잔치국수는 누구와 말아도 부담 없을 만큼 만만한 값이라 더 좋다. 몸도 마음도 써늘해지는 겨울의 초입, 잔치국수라도 편히들 말면 좋겠다. 힘든 이들과 '울음 감춰 먹'는 국수든 퇴근길 포장마차에서 시린 속을 달래는 국수든 목메는 일 없이 후루룩 잘 넘어가는 사람살이면 좋겠다. '저승도 장수하시라'고 마는 잔치국수처럼 저세상까지 훈훈하면 더할 나위 없으리. (조선일보 11월 6일)
정수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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