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 공백이 뚜렷하다
공백이 뚜렷하다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인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주일이, 한 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고렇게, 또 한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문인수(1945~ )
흰 눈과 함께 새해가 시작되었다. 지난해의 궂은 일들이 저 눈 온 설원(雪原)처럼 지워졌으면 좋겠다. 빈 벽 하나 가지기가 힘들다고 탄식한 작가가 있었다. 웬 붙일 것, 걸어둘 것은 그리 많은지. 이발소 그림부터 수건에 달력이나 잡지 부스러기들도 모두 거기 걸어놓고 기대놓고들 산다. 가난한 집 식구 많듯이. 문득, 달력 바꾸느라 떼어놓고 바라보는 벽면은 화사한 맨살이다. 우리네 일년살이가 벽에 때를 묻히는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을 깨끗이 하는 일이 아니라 때를 묻히는 일이라니! '헐어놓기만 하면' 금방 바닥이 드러나는 한 달 혹은 일생! 그 빈 바닥에 '쾅, 닫고 드러눕는' 것이 일생이라면 허망하기 그지없다. 하나 허망을 공부하자. 제가 묻힌 때만 지우고 가도 인생 성공이다. 저 설원처럼.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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