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 여름 가족
여름 가족
사물 A는 아버지 흉내를 낸다. 분명 이 빠진 사기그릇인데 사물 A는 아버지인 척 헛기침을 하며 사물 B를 연주한다. 그러면 찌그러진 양재기인 사물 B는 내 어머니인 듯 사물 A에 맞춰 우는소리를 낸다. 새벽 기침처럼 울리는 곡조에 맞춰 돌연 사물 C가 된 내가 참회를 닮은 자조를 뱉으면 길어진 아침의 혈관으로 빗물이 스며든다. 낯선 계절에 갇힌 아침. 칙칙한 초록의 나라, 함석지붕으로 비가 불협화음을 뿌리고, 무채색의 여름 속으로 뛰어들어간 사물 C는 파랗게 질린다.
―전기철(1954~ )
사물이란 말은 단순히 물건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한 물건을 만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무엇인가의 이름을 부르려면 골똘히 응시하거나 귀 기울이거나 해야 한다. 그래서 사물이란 말은 의미를 가진 물건이란 뜻이 된다.
여기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문득 아버지를 벗어놓은 아버지. 이 빠진 사기그릇 같은 아버지가 있다. 여기 어머니가 찌그러진 양재기처럼 놓여 있다. 어머니를 이탈한 어머니. 사기그릇과 양재기가 부부이니 사이가 좋을 것 같지 않다. 문득 그 부부의 자식인 '나'도 자조적 사물이 된다. 한 가족 세 식구의 불협화음, 여름날의 지루한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칙칙한 초록의 나라'인 여름은 열 덩어리인 도시인에겐 힘겨운 계절이다. 차라리 모든 감정을 벗어놓은 사물이 되고 싶다.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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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억지로는 안 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
지금 너한테로도 누가 먼 길을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 최명희의 ''혼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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