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시조] 귀뚜라미
귀뚜라미
올 것은 그냥 둬도 제삿날 오듯 온다
내내 용케 숨었다가 어느새 오고 만다
깜깜한 기억의 골방 반짝 불이 켜진다
지난해 못 다했던 울음 다시 꺼내 운다
한동안 끊은 소식 쫑알쫑알 들먹이다
오래전 듣던 발자국 생각난 듯 뚝 그친다
―이광(1956~)
▲일러스트 : 이철원
저 기다린 줄 아는가, 귀뚜라미 울음이 바짝 다가왔다. 삽상한 밤바람을 가르는 초가을 벌레 소리는 그대로 한 편의 서정시다. 긴 더위를 물리치며 가을은 이렇게 오고야 마는 것. '제삿날 오듯 온다'는 표현에서 '없는 집에 제삿날 오듯 한다'는 옛말을 겹쳐 읽는다. 굶어도 제삿날은 거를 수 없는 게 삶의 지엄한 예의였던 시절의 환한 불빛도 스친다. 이제 옛 그림이 된 '제삿날'이지만, 우리네 삶의 오랜 순환을 일깨우는 풍경이었다.
그렇듯 '깜깜한 기억의 골방'에 불을 '반짝' 켜주는 귀뚜라미 울음. 그 소리 섶에는 '한동안 끊은 소식 쫑알쫑알 들먹'이는 추억의 힘이 유독 크다. 그러다가도 다가가면 '뚝' 그치곤 하던 귀뚜라미의 울음결에 '오래전 듣던 발자국' 그리워진다. 밝아지는 별빛 아래 오늘 밤도 귀뚜라미 울음깨나 쏟아지겠다. 귀 모으다 펼치는 책갈피며 손등에도 낭랑히 쌓이리라.
정수자 시조시인
[출처] 본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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