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調. 童詩, 漢詩/[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스틸 라이프

무너미 2017. 7. 17. 20:34


    [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스틸 라이프

 

스틸 라이프

 

늙은이의 딸들은 실을 자으며 노래를 한다 야윈 탄식의 손가락 하얀 실이 납빛 얼굴 위로 흘러내린다

 

늙은이의 딸들은 머리카락이 길어진다 손톱 끝이 새파랗게 물들고 달아나던 아이들은 어두운 장롱 속에서 울고 있다

 

시간의 검은 머리카락을 빗질하면서 늙은이의 딸들은 창가에서 하품을 하고 찻잔이 식어간다

 

늙은이의 딸들은 낡은 식탁에 앉아 손가락으로 재의 글씨를 쓰고 흰 빨래가 펄럭인다 누군가 철문을 쾅쾅 두드린다

 

늙은이의 딸들은 후회를 알고 무한한 슬픔을 알고 슬픔의 글자를 쓸 줄 안다 어느 날 늙은이의 딸들이 하얗게 늙어간다

 

이기성(1966~ ) ('채식주의자의 식탁', 문학과지성사, 2015)

 

스틸 라이프(still life)는 정물(靜物)이나 정물화(기법)를 뜻한다. 정물 같은 삶을 비유하기도 한다. '늙은이의 딸들'은 이미 조금 늙은 딸들이다. 늙은이의 딸들이 늙어가는 일상의 바싹 마른 절망과 딱딱하게 굳은 비애를 흑백의 정물화처럼 담아낸 시다.

 

늙은이의 딸들은 실을 잣고 노래를 하고 빗질을 하고 하품을 하고 재의 글씨를 쓴다. 그러는 동안 하얀 실이 주름인 듯 흰머리인 듯 얼굴 위로 흘러내린다. 권태처럼 찻잔이 식어가고, 유구무언처럼 흰 빨래가 펄럭인다. 간간이 학대받는 아이들이 울고, 위험에 빠진 누군가 철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그래도, Keep still(그대로)! 늙은이의 늙어가는 딸들은 후회와 슬픔을 알게 되고 슬픔의 글씨를 쓸 줄 알게 된다. 그렇게 하얗게 늙어간다. 그래도, Steal life(삶을 훔쳐)? 흰빛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출처 : http://new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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