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말년의 양식
말년의 양식
옛 제자도, 옛 제자의 전 남편도, 자기 부인도, 강의노트도, 단풍잎도, 외상전표도, 억새풀도, 모두 희미한 그림자로 떠다닐 뿐.
플라톤의 동굴, 장자의 연못, 니체의 심연, 베토벤의 B플랫…… 나는 암흑과 아름다움의 관계에 대해 그에게 묻지 않는다.
A는 A가 아니로다. A는 A가 아니로다. A는 A가……
내가 속으로 되뇌는 동안 그는 내게 자신만의 말년의 양식을 은퇴 이후 혹은 사별 이후 머리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바위를 공들여 깎고 다듬는 장인의 풍모를 선보인다.
―심보선(1970~ ) ('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사, 2017) 겐자부로는 말년의 작품 '익사'에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빌려왔고, 사이드는 아도르노의 '베토벤 음악의 철학'에서 말년의 양식을 읽어냈다. 미켈란젤로는 걸작 몇 점을 여든이 넘어서 완성했고 에디슨은 아흔이 넘어서도 발명을 했다. 라이트는 아흔에 가장 창의적인 건축가로 인정받았고 모제스는 일흔아홉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늙어서도 여전히 '배우는 중'이었던 그들은 말년의 양식을 완성해냈다. '은퇴한 지 수년이 지난' 노교수 또한 옛 제자나 제자의 전 남편, 니체의 심연이나 베토벤의 B플랫 등으로 구성된 자신만의 말년의 양식을 완성 중이다. 잘 늙어가고 있는 한,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는 삶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장인(匠人)들이다.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
'詩, 詩調. 童詩, 漢詩 > [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년회 (0) | 2017.12.18 |
---|---|
이별가 (0) | 2017.12.11 |
겨울의 끝 (0) | 2017.11.27 |
달밤 (0) | 2017.11.20 |
포도나무를 태우며 (0) | 2017.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