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 앞, 덕수궁...
서울 시민이라면 이 곳을 지나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거 같네요.
버스로든, 전철이든, 아니면 걸으면서라도.....
너무 가까이 곁에 있어 무심히 그냥 지나치는 곳이지요.
조선시대 왕이 계시던 궁궐이려니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내면서.....
그러나 관심을 갖고 이 궁궐의 역사를 알아보면 가슴이 끓어오릅니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다고 이전 글에서 이미 언급했었는데요.
이 경운궁의 정문은 오늘의 대한문이 아니었습니다.
원래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 이었는데요.
그러니까 지금의 시립미술관 쪽이 되겠네요.
그런데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앞으로 태평로를 비롯한 서울시청 앞 넓은 길들이 생기면서
궁궐의 동쪽이 새롭게 번창하고 대안문은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크게 편안하다'는 뜻의 대안문이 지금의 대한문으로 바뀐 건 1906년 화재로 손실이 컸던 궁궐을 다시
재건하면서 문 이름도 '한양이 창대해 진다'는 뜻의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게 된 것 입니다.
시립미술관으로 들어가는 덕수궁 돌담길의 중간 언저리 쯤에 있던 인화문은 지금 종적도 없이 사라졌네요.
근대화, 현대화를 거치면서 태평로는 더욱 확장되었고,
반면에 우리 궁궐, 덕수궁은 축소되면서 대한문의 위치도
원래 있던 자리에서 궁궐쪽으로 40여미터나 더 물러나 오늘의 대한문이 된것 입니다.
다음은 덕수궁의 모태가 된 즉조당 일원입니다.
궁궐이 아니라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저택일 뿐이었던 이 곳이 고종황제께서 사용하시던 정전입니다.
석조전과 나란히 자리했네요.
잔디밭에 수석이 놓여있고 대청마루 문을 열어놓은 곳이 준명당인데
준명당은 고종황제가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석어당입니다.
즉조당 옆으로는 인조반정의 현장 석어당이 있습니다.
석어당은 2층으로된 목조건물입니다.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왕후 김씨가 이 곳 석어당에서 10여년간 감금생활을 했던 곳이지요.
광해군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것 같은 형제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인목대비도 폐위 시키고 석어당에 가두어 둡니다.
당시 여기 경운궁은 서궁이라고 불렀는데 서궁유폐는 결국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인조)은 이곳 석어당으로 인목대비를 찾아와서 정통성을 인정받고
이곳에서 왕으로 즉위합니다.
유폐의 10년 한이 맺힌 인목대비는 석어당 앞마당에 광해군을 꿇어앉히고
36가지의 죄목을 물은 후 능양군에게 옥새를 전한 곳도 석어당입니다.
다음은 덕수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 중화전 입니다.
정일품, 정이품,......문무백관의 자리도 정해져 있는곳....
중화전은 오늘날 덕수궁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정전입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오신 후 5년간 즉조당에서 정무를 보시다가
1902년에 중화전을 멋지게 새로 건립하였지만 이 중화전은 2년후인 1904년에 대화재로 소실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궁핍한 재정으로 중화전은 축소되어 건립됩니다.
그러나 중화전을 둘러싸고 있던 조정의 여러 행각들은 고종 승하 후
일제의 침략시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헐리어 지금은 중화전의 일부만 남아있으므로
중화전의 부속건물들은 그 위치등을 추측만 할 뿐이라고 합니다.
궁궐의 드넓던 땅도 일제는 나누어서 팔아치우는 등
나라를 잃은 우리 역사의 서글픈 과거가 가슴을 칩니다.
다음은 고종의 침전으로 건립된 함녕전인데
고종은 이 곳에서 기거하시다가 68세를 일기로 여기 함녕전에서 승하하셨습니다.
그러나 1904년 함녕전에서 발생한 대화재는 덕수궁의 거의 대부분을 태워 없애버려 잿더미로 변하게 합니다.
당시 일본측 언론에선 온돌을 말리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말하였지만
그 피해 범위로 봐서 일제에 의한 고의적인 방화가 아니었는지 오늘날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각국 공사관 사이에 위치한 덕수궁에 고종이 기거하고 있는 것을
일제는 아주 못마땅해 하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다음의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고위관료와 외교사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함녕전 뒤에 전 벽돌로 꾸며진 아름다운 유현문입니다.
이 유현문을 지나면 우리의 전통과 서양식 건축의 조화를 이룬 정관헌이 나타납니다.
정관헌은 궁궐후원의 언덕에 위치한 휴식용 건물입니다.
함녕전 뒤에 자리잡고 있어서 전통 궁궐에서 후원의 정자구실을 하던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00년경에 러시아 건축가가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만든거라는데
고종황제는 이곳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쓸쓸함도 달래고 외교사절들도 이곳에서 만나
담소를 즐기던 곳이라고 하네요.
고종께서는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으로 커피맛을 보셨다는데
경운궁으로 환어하신 후에도 커피 맛을 잊지못해 계속 즐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커피와 관련된 고종 독살미수 사건도 발생했지만 독약이 들은 커피를 바로 내 뱉은 고종은
화를 면했지만 한모금 마신 황태자(후에 순종)는 그 여독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이었던 경운궁은
서편으로는 오늘의 예원학교와 덕수초등학교,옛 경기여고 터를 포함하였고
동편으로는 시청앞 광장과 구세군터 등을 포함하는 넓은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궁역이 해체되면서 오늘의 덕수궁모양으로 축소되었습니다.
현재의 석조전 뒤에 돈덕전이 있었고, 순종이 그 곳에서 즉위한 역사적인 곳이건만
궁역 해체와 더불어 미국대사관저와 덕수초등학교 사이로 길이 뚫리면서 궁이 철거 됩니다.
미국대사관저 서쪽에 위치해 있던 중명전 일원으로는 환벽정과 만회당등이 있었지만
경술국치와 함께 우리의 궁궐이 해체되고 토지소유권도 매각되고 넘어가면서
오늘의 덕수궁은 초라한 모습으로 남겨져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과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경운궁의 옛 모습 복원 과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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