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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자료1

무너미 2010. 11. 16. 16:32

창덕궁은 1405년(테종 5년), 정궁인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이궁이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뒤 잠시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경복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창덕궁을 세워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어린 동생들을 죽였던 왕자의 난이 벌어졌던 경복궁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후 세조 때 창덕궁이 크게 확장되었고, 성종 때 창덕궁 옆에 창경궁을 세우고 이 둘을 합해, 경복궁의 동쪽 궁궐이라 하여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그후 임진왜란이 발발해 모든 궁궐이 불 타 없어지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와 광해군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복구해 창덕궁에 머물렀다. 그후 인조반정 직후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은 다시 한 번 큰 화재를 당하지만 곧 복구했다. 경복궁은 훗날 고종 때에 가서야 복구되어, 사실상 정궁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며, 그 기간 동안 조선의 임금들은 창덕궁에서 머물며 정사를 보았다. 이런 이유로 창덕궁은 비록 이궁이지만, 정궁인 경복궁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조선의 임금들이 머문 궁이 되어 실질적인 정궁의 역할을 했다.
그 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내전에 큰 불이 일어나자,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내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을 철거해 그 목재로 창덕궁의 대조전과 희정당을 복구했다. 일제 시대에 창덕궁의 많은 건물들이 헐렸으나 최근에 다시 복원해 옛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창덕궁은 궁궐의 전형적인 형태인 남향의 일직선 배치와는 다른 구조이다. 이는 창덕궁 뒷산인 매봉을 그대로 둔 채 이 지형을 활용해 궁궐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창덕궁은 정형에서 벗어난 형태의 궁궐이지만, 자연미를 잘 살린 궁궐로 평가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특히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창덕궁은 정문 영역인 돈화문 영역, 임금의 업무 공간인 외전 영역인 인정전 영역, 임금의 집무 공간인 선정전 영역 그리고 침천 영역인 희정당과 대조전 낙선재와 후원 영역으로 구분된다.

1. 돈화문(敦化門, 보물 3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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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돈화문]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지고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었다. 현재의 돈화문은 이때 세운 문으로 조선의 궁궐 정문 중 가장 오래된 문이며 또 가장 큰 문이다. 돈화문은 인정전의 정남쪽에 배치되지 못하고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이는 인정전의 정남쪽에 종묘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종묘 때문에 정문 앞길을 곧게 만들지 못해 정문인 돈화문을 서쪽으로 옮겨 앞길을 냈다.
돈화(敦化)라는 이름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대덕돈화(大德敦化)’라는 말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대덕돈화(大德敦化)’라는 말은 ‘큰 덕으로 백성을 크게 교화시킨다’는 의미라 한다.
조선 시대에는 돈화문 이층에 큰 종과 북을 걸어 시각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치고 금지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쳐서 알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돈화문 앞에는 긴 월대가 있다. 아마 궁의 정문 앞에는 모두 월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발굴된 것은 이 돈화문 앞 월대뿐이다. 이 월대는 일제시대에 돈화문으로 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흙으로 덮었던 것을 최근에 다시 발굴했다. 일제시대에 이 월대를 묻고 돈화문의 문지방을 뺐다 끼웠다 할 수 있도록 개조해 차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현재 돈화문의 문지방은 없는 상태다. 다른 궁궐의 정문이 모두 3칸인데 비해 돈화문은 5칸인 점이 특이하다.

2. 금천교(錦川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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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금천교 : 중앙 교각에 귀면이 새겨져 있고 난간 위와 교각 상부에도 석수가 있다]
 
금천교는 창덕궁의 명당수(금천)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1411년(태종11년)에 축조되었다. 궁궐의 명당수를 지나는 다리를 보통 금천교(禁川橋)라 하는데, 이는 궁궐을 출입하는 신하들이 이 자리에서 마음을 씻으라는 의미와 이 다리를 경계로 임금과 백성의 공간을 구분하는 의미가 있다.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는 명당수(금천)의 물이 비단결 같이 맑다 하여 ‘비금 금(錦)’ 자를 써서 금천교(錦川橋)라 이름 지었다. 현재 창덕궁의 금천교는 태종 때 만들어진 그 다리로, 창덕궁의 금천교가 서울에 있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라 한다. 다리는 교각이 아치를 그리고 있는 홍예교로, 석수(石獸, 돌짐승)와 귀면(鬼面)을 조각해 사악한 기운을 막고 있다. 금천교는 돈화문과 일직선으로 배치되지 않고 오른쪽으로 꺽인 길에 있는데, 이는 뒷산인 매봉을 헐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궁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런 전각의 배치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궁궐로 평가 받고 있다.

3. 진선문(進善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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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금천교와 진선문]

금천교를 지나면 바로 만나는 문이 진선문이다. 진선문은 궁의 중문에 해당하는 문으로,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던 것을 1999년 복원 때에 다시 세웠다. 태종 때 이 진선문에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도록 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정문을 들어와 신문고를 치기는 너무 힘들어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진선문을 지나면 행각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나오는데 이 곳을 외행각 마당이라 부른다. 이 외행각에 정청, 상서원, 호위청 등의 관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행각에 이런 관서의 현판만 붙어 있다.

4. 인정문(仁政門, 보물 8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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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인정문]

진선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인정문이 있다. 인정문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으로, 현재의 문은 순조 4년(1804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후 일제시대에 일본식으로 이루 변형되었던 것을 198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인정문에서는 큰 행사가 치러지기도 했는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등의 임금이 이 문 앞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5. 인정전(仁政殿, 국보 2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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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외국 사신의 접견이나 왕의 즉위식 등의 큰 행사가 열리던 곳이다. 1405년(태종 5년)에 처음 세웠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09년(광해군 1년)에 복원했다. 그러나 1803년(순조 3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그 다음해인 1804년(순조 4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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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은 이단 월대 위에 세워진 이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통으로 단층이다. 내부는 다른 정전처럼 어좌가 있고 어좌 뒤에 삼 단으로 만들어진 나무 병풍인 삼절병(三折屛, 곡병曲屛이라 부르기도 한다)이 있고 그 뒤로 일월오봉도(일월오봉도를 그린 병풍을 일월오봉병 또는 일월오악병이라 부른다)가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위 천장에는 보개가 설치되어 있고,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인정전은 다른 궁의 정전과는 달리 1908년(순종 1년)에 서양식으로 일부가 개조되어 전기가 들어오고 샹들리에와 커튼 등이 설치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인정전 앞마당인 조정에는 다른 궁과 마찬가지로 어도와 답도 그리고 품계석이 있다.
인정전의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오얏꽃, 즉 이화(李花) 문양이 들어 있다. 이는 1908년 창덕궁을 개조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황실의 문장처럼 쓰던 문양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황실의 성씨인 이 씨를 의미하는 오얏꽃을 여러 곳에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 이화 문양은 인정문 용마루의 앞뒤에도 각각 세 개씩 들어 있다. 이 이화 문양에 다른 의견도 있다. 고종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조선이 백성들의 나라인 대한제국이 아니라 일개 이 씨 집안이 다스리는 나라로 그 의미를 격하시키기 위해 만들어 넣었다는 의견도 있다.

6. 숙장문(肅章門)과 어차고(御車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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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어차고] 

인정전을 본 뒤 다시 인정문을 나와 왼쪽으로 가면 숙장문이 있다. 숙장문은 내전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숙장이란 이름은 1475년(성종 6년) 서거정이 지은 이름이라 한다. 일제시대에 헐렸다가 1996년 복원되었다. 이 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어차고(御車庫)가 있다. 본래는 정승들이 모여 국사를 논의하던 빈청(賓廳) 건물이었는데, 후에 순종 황제의 차고로 쓰였다. 예전에는 어차고에 순종 황제의 차였던 캐딜락과 다임러 그리고 평교자(종2품 이상 대신들의 가마)와 초헌(대신들의 외바퀴 수레), 주정소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모두 경복궁 앞에 있는 고궁박물관으로 옮겨가 현재는 아무것도 없다.

7. 선정전(宣政殿, 보물 8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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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선정전]
 
어차고 맞은편으로 가면 선정문을 지나 선정전이 나온다. 선정전은 임금이 평소에 업무를 보는 공간인 편전(便殿)으로, 조선의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 지붕 건물이다. 편전은 원래 정전 뒤에 있어야 하지만 인정전 뒤 언덕을 그대로 두고 인정전의 동쪽에 편전인 선정전을 세웠다. 1405년(태종 5년)에 처음 세웠을 때의 이름은 조계청(朝啓廳)이었으나, 1461년(세조 7년)에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이후 몇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년)에 다시 세운 건물이다.
선정전은 선정문에서부터 행각으로 이어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를 보통 복도각이라 부르는데 건물과 건물 사이에 설치해 비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며, 천랑(穿廊)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선정전의 복도각은 다른 궁의 편전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로, 이는 조선 후기에 희정당이 편전으로 쓰이고 이 선정전이 혼전(魂殿)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혼전이란 임금이 승하했을 때 삼년상을 치루던 건물로 위패나 영정을 모시는데, 주로 복도각이 설치된다. 경복궁의 태원전이 대표적인 혼전이다. 선정전 대신 희정당이 편전으로 쓰인 까닭은 선정전 영역이 좁았기 때문이라 한다.

8. 희정당(熙政堂, 보물 8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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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희정당 현관]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 편전으로 쓰인 건물이다. 희정당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복원되었고 그후 여러 차례 불타 없어졌던 것을 1920년에 다시 세운 건물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1917년 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일본인들이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 그 목재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때 희정당은 근대식 건물로 탈바꿈했는데, 내부에 응접실을 만들어 카펫을 깔고 서양식 가구를 들여놓고 유리창을 만들었다. 이 응접실 벽에 걸린 그림은 조선 말의 대표적 서예가인 해강 김규진 선생의 ‘금강산만물초승경도’와 ‘총석정절경도’라 한다. 또 밖으로 돌출된 현대식 현관을 만들어 현관 앞에 차를 세울 수 있게 만들었다. 이 현관에도 중앙에도 작은 이화 문양이 있다. 현재 일반인들은 희정당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선정전과 희정당 건물 사이로 들어가 대조전과 희정당 중간 영역으로 가서 희정당 내부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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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조전(大造殿, 보물 8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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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대조전]

희정당 내부를 보고 뒤의 선평문을 지나면 바로 대조전 영역이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내전, 즉 침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건물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동쪽에 왕의 침실을 서쪽에 왕비의 침실을 만들었다. 왕비의 생활 공간이므로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대조전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09년(광해군 원년)에 복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와 1833년(순조 33년) 그리고 1917년에 각각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후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헐어 그 목재로 복원했으며 이때 일부가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성종, 인조, 효종,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했으며, 대조전 동쪽 행각인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이때 한일합방을 결정했던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대조전은 침전 건물이므로 용마루가 없다. 대조전의 왕비의 침전인 중전이므로 뒤에 화계가 있어야 하는데 대조전 뒤로 여러 전각들이 자리하고 맨 뒤에 있는 경훈각 뒤에 화계가 조성되어 있다. 이 대조전의 화계는 경복궁의 아미산 못지않게 아름다운 화계이다. 대조전 뒤의 경훈각은 대조전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대조전의 부속 건물이다. 본래 2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 후 복원 시 단층으로 복원했다.

10 성정각(誠正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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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성정각 일원]

대조전 일원을 돌아나오면 왼쪽으로 바로 보이는 건물들이 성정각 일원이다. 이 성정각은 본래 동궁전 영역이었다고 한다. 과거 동궁전은 현재 후원으로 향하기는 길에도 중희당이란 건물이 있어, 건너편의 육각 정자인 삼삼와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중희당 자리에 후원으로 넘어가는 길이 생겨 동궁전이 잘리고 말았다. 일제시대에는 이 성정각 일원이 내의원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성정각 뒤 관물헌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이라 한다.

11. 낙선재(樂善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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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낙선재 일원]

성정각 동남쪽에 낙선재 영역이 있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있는데 이를 통칭해 낙선재라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년)에 세웠고 이웃한 석복헌과 수강재는 그 다음해에 세웠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로 쓰였고, 석복헌은 헌종의 후궁 경빈의 처소로 쓰였고, 수강재는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가 썼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고종과 순종이 이곳에서 머물던 적이 있었고,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낙선재에서 머물다 돌아가셨고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한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에서 머물다 생을 마감했다. 또 고종의 고명딸이었던 덕혜옹주도 일본에서 귀국해 이곳 낙선재에서 머물다 1989년 숨을 거두었다. 화계와 꽃담, 문창살 등이 아름답다고 알려졌다. 낙선재 뒤쪽 언덕에는 상량정(上凉亭)이라는 정자와 행각이 있는데, 상량전의 이름은 평원루라 한다. 현재 낙선재 영역에서는 낙선재만 일반 관람이 허용되고, 석복헌과 수강재는 매일 두번씩 진행되는 낙선재 특별관람 때만 볼 수 있다.